▲3일 SBS <힐링캠프> 시청자 특집에 출연한 강신주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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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가 월요일 SBS의 <힐링캠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강신주의 언행이 영 불편한 사람들도 있고,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신주는 요즘 잘 팔리는 사람이다. 많이 소비되니 소비자 고발도 그만큼 많은 건 당연할 테다. 헌데 강신주에 대한 사람들의 짜증은, 그에 대한 대량의 선호에 묻힐 정도를 넘어선 모양새다.
사람들은 왜 강신주에 떨떠름해 할까? 물론 강신주 본인이라면 지금까지 주장해온 대로 자신이 사람들의 진짜 문제점, 아픈 곳을 (바로 그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 과감히 찌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철학자와 비철학자강신주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를 철학자로 소개한다는 점을 우스워한다. 일단 사회의 보편적 기준에서 보면 강신주는 어디까지나 철학을 전공한 강연자, 저술가이지 철학자는 아니다.
물론 강신주가 자칭 철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나 역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무엇보다 먼저 미모로 평가받고 싶은 사내다. 평생 단 하나의 명함만 써야 한다면 나는 서구화되고 획일화된 이 시대의 억압적 미적 취향에 맞서 나의 명함에 '미남(美男)' 두 글자를 분연히 새길 것이다. 진심이다.
재밌는 건 강신주가 철학자라는 자칭을 자신과 대중을 구분하는 용도로 쓴다는 점이다. 강신주는 "철학자들이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거리낌 없이 "내려온다"고 말한다.
대중은 공장에서 양산된 기성품이 아니다. 대중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상당히 기만적이다.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개인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쓰는 이유는 편의성을 위해서다. 강신주 자신은 대중의 일원이 아니란 말인가?
강신주는 자신과 대중을 분리하는데, 나는 근거 없는 심리학 따위는 펼치고 싶지 않으므로 이것을 강신주의 자의식이라느니, 그의 오만함의 증거라느니 하는 비생산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텔레파시 품성론'을 제쳐두더라도 한 가지 맥락은 분명하게 남는다. 이 분리법은 강신주에게 판매 전략으로 기능한다.
힐러와 킬러
강신주가 <힐링캠프>에 나와서 고운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상이한 영업 전략의 충돌이었으니 삿대질은 예정된 것이었다. 다만 그게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자가 못 되는 연예인들과 방청객들을 혼내는 결과로 나온 것뿐이다.
강신주는 '힐링'이라는 단어와 '자기계발서'를 무용하다고 한다. 약효가 잠시만 나타나는 진통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은 왜 자기계발서가 아니란 말인가? 성공과 찬란한 미래를 제시하는 텍스트만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독자(청중) 자신을 위해' 특정한 태도와 행동을 주문한다면, 그게 자기계발서이며, 힐링이며, 멘토링이다.
마침 강신주가 자칭으로나마 '철학자'이니 철학 이야기를 해 보자. '유쾌'를 유발하는 것이 '미(美)'라면 어찌하여 우리는 비극 작품을 예술로 소비하는가? 왜 우리는 공포물, 고어물과 같은 '불쾌'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가? 철학은 미란 무엇인가를 고찰함과 동시에 추(醜)가 미로 전환되는 과정도 탐구한다. 예술의 영역에서 불쾌도 결국 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신주의 독설도 힐링의 한 종류, 즉 신제품 힐링이다.
흔해 빠진 힐링이나 강신주 식의 '킬링'이나,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의 소비재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 효능도 다를 리 없다. 강신주는 <힐링캠프>의 그 '힐링'이라는 단어가 너무 싫다고 한다. 물론이다. 현대기아차 영업사원은 외제차를 칭찬하지 않는다.
힐러의 영업, 킬러의 영업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 불행한 사회는 약을 만든다. 위로, 훈계, 비법 전수, 질책 등 다양한 약제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이 형성된다. <힐링캠프>는 해당 시장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힐링캠프>는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판매된는 약일 뿐, 처방전의 공식 자체는 오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