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의중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마불 갤러리. 이종국씨는 이곳에서 한지를 제작하면서 다양한 공예품들도 전시판매하고 있다.
유순상
한지는 1973년 무렵까지 이 마을의 주요 생산품이었다가 한옥의 창호지와 장판지 수요 등이 줄면서 명맥이 끊겼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한지를 되살리는데, '평범한 부처'라는 뜻의 마불(麻佛)을 호로 쓰는 공예가 이종국(52)씨의 공이 컸다.
이씨는 충북 괴산군 출신으로 청주의 서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셋방살이하며 못 하나 박기도 어렵고 밤늦게 작업하기도 눈치 보였던 설움이 쌓여 그림을 접었다. 운영하던 입시미술학원을 4년 만에 닫고 1998년 36살의 나이에 벌랏마을로 들어왔다.
"택시 잡아타고 '이 지역에서 가장 오지로 가자'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자신의 고향인 벌랏마을로 데려다 주었어요."그는 한동안 벌랏마을의 폐가에서 약초를 캐먹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한지를 떴던 어르신이 집 벽장에서 한지 한 다발을 꺼내 보여주었다. 자신이 땅에 묻힐 때 쓸 종이라는 설명과 함께.
은은한 색감의 한지를 보고 이씨는 큰 감명을 받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에 종이를 끼워 세상에 알리고, 한지 장판 위에서 살다 다시 종이에 덮여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게 우리 민족의 삶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당시 마을에는 한지를 뜰 수 있는 지장(紙匠·종이 뜨는 사람)이 단 두 명 남아있었는데, 이씨는 그들을 붙잡고 전통제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닥나무로 팽이를 치고 놀았어요. 목수였던 아버지가 밭둑에다 닥나무를 수확해 놓으면 종이 뜨는 사람이 수거해가요. 며칠 뒤 1년 쓸 종이를 가져다 준다고. 그런 인연이 없었으면 닥나무의 가치를 몰랐겠죠."장신구와 장난감 등 닥나무 공예품도 다양하게 생산한지는 늦가을 닥나무를 수확해 초겨울까지 재료를 만든다. 이 때문에 차가운 종이, 한지(寒紙)라고 불린다. 닥나무 겉껍질을 긁어내고 짓이겨 용해하는 등 99번의 고된 공정을 거쳐 백지(百紙)라고도 말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종이가 들어온 시기는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 담징(579~631)이 일본으로 조선 제지법을 전수한 610년(고구려 영양왕 21년) 전으로 추정된다. 종이 생산의 중흥기는 학문이 발달해 서책 생산이 급증했던 조선시대 세종 때다.
하지만 19세기 경제성이 뛰어난 서양종이가 물밀듯 들어오고 1882년(고종 19년)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폐지되면서 한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다. 1950~1960년대 들어서는 원료에 분산제(고체를 액체로 녹여 분산시키는 약제)와 화공약품인 표백제를 사용하면서 환경 오염사업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