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방송된 KBS 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의 한 장면.
KBS
새롭게 들어간 조항 중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규정(제29조 제2항)을 보자. 이 규정은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된다', '방송은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과 적법한 교류를 저해하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말이다.
방송이 헌법의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내보내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가 무엇인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내용이 심의 규정으로 들어가 있으면, 심의가 심의위원들 머릿속에 있는 자의적인 잣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단순한 우려가 아님은 실제 사례로도 확인된다. 지난 2012년 KBS가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해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이라는 다큐를 내보냈는데, 방심위가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징계를 뒤늦게 추진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정율성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정율성이 항일운동가이자 중국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는다는 사실과,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두 다뤘다. 그런데도 방심위원들은 "6·25에 참전한 사람을 왜 다큐로 미화하나"라며 징계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는 우리 헌법의 질서를 해치는 것이라는, 이해하지 못할 사고가 심의위원 다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심의위원들 스스로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식이라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정당해산심판청구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 헌법의 적(敵)을 편드는 프로그램"이라며 징계할 수 있다.
방송 자유 옥죄는 규정은 그대로 남겨두고...정작 언론단체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재판중 사안" 조항은 이번 개정안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규정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방송은 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을 다룰 때에는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되며, 이와 관련 심층 취재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줄 것 같으면 방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 KBS는 <추적60분>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사건의 전말' 편을 방송했다가 이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이 규정 역시 현실과 거리가 멀다. 방송에서 관심을 가지고 다루는 사안들 중 다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것이고, 그 갈등은 대개 법원에서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 이런 규정을 두는 건, 대부분의 사회적 논란들에 대해 방송으로 다루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송이 일단 시작되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몇 년이 걸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판이 끝난 뒤에 사안에 대해 방송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규정은 방송의 자유를 옥죄는 대표적인 규정으로 지적되어 왔지만, 방심위는 이 규정을 그래도 남겨두었다.
사실, 심의규정이 다소 엉망으로 만들어져 있어도 심의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의를 진행한다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심의위원들에게는 공정한 심의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심의위원 개개인의 자질 문제보다 심각한 건, 심의위원 구성 방식이다. 9명의 심의위원 중 6명은 대통령과 여당이 추천한 인사로 채워지고, 나머지 3명이 야당 쪽 추천인사로 구성된다. 여당 쪽 위원들이 수적 우세를 앞세우면 합리적 토론과 설득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간의 수많은 '정치심의'들 대다수가 다수 위원들이 밀어붙이면 소수 위원들이 반대하다가 결국 머릿수에 밀려 굴복하는 식이었다. 방송심의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방심위 구성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공정한 심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방송심의규정 뿐만 아니라 심의제도 전체를 놓고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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