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16분 만에 700줄... 신부·수녀님의 김밥 '신공'

대한문 앞 미사 천주교인들, 쌍용차 해고자들과 김밥 만들어

등록 2014.01.15 20:31수정 2014.01.15 20:31
4
원고료로 응원
 와락에 모인 신부, 수녀들이 김밥을 싸고 있다.
와락에 모인 신부, 수녀들이 김밥을 싸고 있다. 박윤정

건물 2층에 있는 문을 열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익숙한 김밥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복도 끝에 위치한 넓은 공간에는 탁자 4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탁자에 깔린 대형 비닐 위로 볶은 당근, 데쳐서 간한 시금치, 햄, 단무지 등 김밥 재료들이 밥 위에 올라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7시 25분, 탁자에 둘러앉은 25명의 쌍용자동차 노조원과 신부, 수녀들은 비닐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른 채 김밥을 말고 있다. 한 수녀는 김 위에 밥을 깔고 또 한 수녀는 깻잎 두 장을 이어 붙인 뒤 그 위에 다른 김밥 재료들을 차곡차곡 놓았다. 그들이 분업하며 하나의 김밥을 만드는 데는 2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 옆에서 신부와 노조원 등 4~5명은 식탁에 둘러서서 김밥을 썰고 포장을 하고 있었다. 이강서 신부가 김밥을 썰었다. 그 옆에 있던 자원봉사자는 그 김밥을 받아 참기름을 바르고 참깨를 뿌렸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마주 앉은 노조원은 은박지에 김밥을 돌돌 말았다. 다른 노조원들은 포장된 김밥을 받아 스티로폼 박스에 담고 있었다.

신부·수녀님 30여 명 둘러앉아 김밥 '차곡차곡'

 분주히 김밥을 싸는 수녀들.
분주히 김밥을 싸는 수녀들.박윤정

 김밥을 썰고 있는 이강서 신부(오른쪽)와 서종순 수녀
김밥을 썰고 있는 이강서 신부(오른쪽)와 서종순 수녀박윤정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평택 평택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와락'의 모습이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센터인 이곳에 모인 30여 명의 신부와 수녀들은 이날 성경과 묵주 대신 김과 단무지를 손에 들었다.

이들은 지난해 4월 8일부터 225일 동안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행된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한 신부, 수녀들로 해고노동자들이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판매할 김밥 싸는 일에 동참했다. 해고노동자들의 김밥 싸기는 지난해 11월 27일을 시작으로 1월 1일을 제외하곤 매주 화요일마다 이곳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어디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동훈 인천교구 신부가 김밥 하나를 들고 "누가 김밥 옆구리를 터뜨렸냐"고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수녀가 "제가 그런 것 같아요"라며 부끄러워하자 주위 사람들이 웃었다. 잠시 뒤, 한 수녀가 김밥에 시금치를 빼먹고 넣지 앉자 마주 앉아 있던 수녀는 "수녀님, 시금치 어디다 감추셨어요? 김밥을 다시 풀어서 넣어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김밥으로 회복되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이날 김밥 싸기에 함께 한 신부는 장동훈 신부와 이강서(서울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신부를 비롯한 6명이다. 26명의 수녀들은 성가소비녀회, 수원관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등 7곳에서 모였다.


대한문 앞 미사를 처음 제안했던 장동훈 신부는 "김밥 파는 것은 (단순한) 수익사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장 노동자를 '살아남은 자', 해고노동자를 '죽은 자'라 칭하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김밥'으로 뛰어 넘어 치유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며 동참 이유를 밝혔다.

오후 7시 35분, 다들 김밥 싸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쌍용차 노조원이 박카스 등을 가져와 "목 축이고 합시다"라며 신부, 수녀들에게 나눠줬다. 30분 넘게 끼고 있던 위생장갑을 잠시 벗고 다들 음료수를 마셨다. 그 핑계로 허리도 펴고 쉴 법도 한데 음료만 마시고 다시 장갑을 꼈다. 차곡차곡 김밥 재료들을 쌓는 손길이 분주했다.

김밥 싸는 사람들 뒤쪽에 있는 주방에서는 노조원 가족들이 김밥에 들어갈 달걀을 구워내고 우엉을 간장양념에 졸였다. 누군가가 "밥 모자라요"라고 하니 밥솥에서 밥을 푸고 소금 간을 맞춰서 갖다 줬다. 이번에는 단무지가 없다는 주문이 들어오자 단무지 포장을 뜯어서 갖다 줬다.

한 수녀는 밑간이 된 시금치를 한 주먹 정도 크기로 쥐어 수분을 꼭 짜냈다. 노조원이 다가와 아까 본인이 짰다고 하니 수녀는 "덜 짠 것 같아요. 김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수분을 쫙 빼줘야 하니 최소한 두세 번은 눌러 짜야 해요"라고 정석대로 시범을 보였다.

오후 7시 50분이 되자 스티로폼 박스에 김밥을 담던 한 노조원이 "400줄 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밥을 싸던 신부, 수녀들이 반색했다. "자 이제 좀 더 힘냅시다"라는 외침과 함께 김밥 싸기는 계속 됐다. 터진 김밥은 서로에게 먹여줬다.

"갈수록 천원짜리 많아져... 공장 안 노동자들과 소통"

미사에 참여했던 신부, 수녀들은 지금까지도 노조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대한문 앞 미사가 끝난 후에도 노조와 사제단 신부들은 꾸준히 만나왔다"며 "(신부, 수녀들에게) 평택에 한 번 와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침 오늘 오겠다고 하셔서 김밥을 함께 싸게 됐다"고 말했다.

시계 바늘이 오후 8시를 지나 16분에 다다랐을 무렵, 목표치 700줄이 완성됐다. 7시에 시작해 약 1시간 16분 만에 '목표달성'을 한 것이다. "수고 많으셨어요"라며 다 같이 박수를 치고 등도 토닥였다. 4~5명의 수녀들은 탁자 위에 깔았던 비닐을 걷었다. 노조원들은 탁자를 벽 쪽으로 다 밀어 쌓았다. 수녀들이 빗자루, 밀대 가져와 바닥을 청소했다.

 김밥 700줄 싸기가 끝나고 뒷정리 중인 수녀들
김밥 700줄 싸기가 끝나고 뒷정리 중인 수녀들 박윤정

같은 시각 주방 쪽에서는 노조원 가족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수녀 2~3명은 그 뒤쪽 바닥에 앉아 마른 행주로 그릇을 닦았다. 한 수녀의 옷에 밥풀이 붙어 있자 누군가가 "수녀님, 그거 나중에 몰래 드시려고 붙여 놓으셨어요?"라며 농담을 했다. 수녀는 "그러게. 딱 걸렸네"라며 재치 있게 답하며 밥풀을 뗐다.

이창근 쌍용차 노조 기획실장의 부인인 이자영씨는 "생각보다 많은 신부, 수녀님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화를 바라는 많은 분들의 마음이 느껴진다"며 함께한 신부, 수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수녀회 주관의 바자회에서 김밥을 많이 싸봤다는 권숙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는 "노동자들과 함께 한다는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겠다"며 즐거운 표정으로 김밥을 쌌다. "해고노동자와 공장노동자가 김밥을 통해 소통하고 서로 용서와 화해를 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덧붙였다.

해고노동자 김아무개씨는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김밥을 처음 팔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는 한 사람이 많게는 7~8줄까지 사가서 만 원짜리 지폐가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아도 2줄 정도 사기 때문에 천 원짜리가 더 많아요. 그래도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를 찾는 공장 노동자들이 더 많아졌어요."

김정욱 쌍용차 노조 사무국장은 "김밥을 사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소통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밥 싸기에는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계와 시민단체도 동참할 예정이다. 지난 7일에는 인천지역의 대학생 30여 명이 방문해 김밥을 쌌다. 김정욱 사무국장은 "얼마 전 평택 쌍용차 공장을 다녀간 목사, 신도들도 김밥 싸기를 돕고 싶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그는 "알음알음해서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면 우리의 아픔도 회복되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했다.

노조 측은 "날이 풀리면 김밥이 아닌 다른 방법을 강구해 공장 노동자에게 다가가는 통로를 마련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활동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단체사진 촬영 중인 노조원, 신부, 수녀들
단체사진 촬영 중인 노조원, 신부, 수녀들박윤정

덧붙이는 글 박윤정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쌍용자동차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밥 #와락 #천주교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4. 4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5. 5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