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을 썰고 있는 이강서 신부(오른쪽)와 서종순 수녀
박윤정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평택 평택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와락'의 모습이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센터인 이곳에 모인 30여 명의 신부와 수녀들은 이날 성경과 묵주 대신 김과 단무지를 손에 들었다.
이들은 지난해 4월 8일부터 225일 동안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행된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한 신부, 수녀들로 해고노동자들이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판매할 김밥 싸는 일에 동참했다. 해고노동자들의 김밥 싸기는 지난해 11월 27일을 시작으로 1월 1일을 제외하곤 매주 화요일마다 이곳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어디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동훈 인천교구 신부가 김밥 하나를 들고 "누가 김밥 옆구리를 터뜨렸냐"고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수녀가 "제가 그런 것 같아요"라며 부끄러워하자 주위 사람들이 웃었다. 잠시 뒤, 한 수녀가 김밥에 시금치를 빼먹고 넣지 앉자 마주 앉아 있던 수녀는 "수녀님, 시금치 어디다 감추셨어요? 김밥을 다시 풀어서 넣어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김밥으로 회복되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이날 김밥 싸기에 함께 한 신부는 장동훈 신부와 이강서(서울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신부를 비롯한 6명이다. 26명의 수녀들은 성가소비녀회, 수원관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등 7곳에서 모였다.
대한문 앞 미사를 처음 제안했던 장동훈 신부는 "김밥 파는 것은 (단순한) 수익사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장 노동자를 '살아남은 자', 해고노동자를 '죽은 자'라 칭하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김밥'으로 뛰어 넘어 치유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며 동참 이유를 밝혔다.
오후 7시 35분, 다들 김밥 싸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쌍용차 노조원이 박카스 등을 가져와 "목 축이고 합시다"라며 신부, 수녀들에게 나눠줬다. 30분 넘게 끼고 있던 위생장갑을 잠시 벗고 다들 음료수를 마셨다. 그 핑계로 허리도 펴고 쉴 법도 한데 음료만 마시고 다시 장갑을 꼈다. 차곡차곡 김밥 재료들을 쌓는 손길이 분주했다.
김밥 싸는 사람들 뒤쪽에 있는 주방에서는 노조원 가족들이 김밥에 들어갈 달걀을 구워내고 우엉을 간장양념에 졸였다. 누군가가 "밥 모자라요"라고 하니 밥솥에서 밥을 푸고 소금 간을 맞춰서 갖다 줬다. 이번에는 단무지가 없다는 주문이 들어오자 단무지 포장을 뜯어서 갖다 줬다.
한 수녀는 밑간이 된 시금치를 한 주먹 정도 크기로 쥐어 수분을 꼭 짜냈다. 노조원이 다가와 아까 본인이 짰다고 하니 수녀는 "덜 짠 것 같아요. 김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수분을 쫙 빼줘야 하니 최소한 두세 번은 눌러 짜야 해요"라고 정석대로 시범을 보였다.
오후 7시 50분이 되자 스티로폼 박스에 김밥을 담던 한 노조원이 "400줄 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밥을 싸던 신부, 수녀들이 반색했다. "자 이제 좀 더 힘냅시다"라는 외침과 함께 김밥 싸기는 계속 됐다. 터진 김밥은 서로에게 먹여줬다.
"갈수록 천원짜리 많아져... 공장 안 노동자들과 소통" 미사에 참여했던 신부, 수녀들은 지금까지도 노조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대한문 앞 미사가 끝난 후에도 노조와 사제단 신부들은 꾸준히 만나왔다"며 "(신부, 수녀들에게) 평택에 한 번 와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침 오늘 오겠다고 하셔서 김밥을 함께 싸게 됐다"고 말했다.
시계 바늘이 오후 8시를 지나 16분에 다다랐을 무렵, 목표치 700줄이 완성됐다. 7시에 시작해 약 1시간 16분 만에 '목표달성'을 한 것이다. "수고 많으셨어요"라며 다 같이 박수를 치고 등도 토닥였다. 4~5명의 수녀들은 탁자 위에 깔았던 비닐을 걷었다. 노조원들은 탁자를 벽 쪽으로 다 밀어 쌓았다. 수녀들이 빗자루, 밀대 가져와 바닥을 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