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력이 무려 십갑자에 이르는 번역가 김완
임승수
"동료 번역가 중에서도 자신을 '죠죠러'로 자청하면서 <죠죠의 기묘한 모험> 번역에 관심을 가진 분이 있었죠. 단지 그 분은 애니북스 출판사와 일을 안 하셨고 저는 애니북스 출판사와 일을 했다는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에요. 소위 '덕질'이라고 그러잖아요? 제 취미가 그런 분야인데요. '나는 이런 거 좋아해. 이런 거 늘 하고 싶었어.' 이런 식으로 제 취미에 대해 기탄없이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출판사 측에서 그런 부분을 고려해 맡겨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다 쓴 치약을 꾹 눌러 짜내는 듯한 억지스러움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운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겸손함, 그것은 김완씨와 친분을 나누기에는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덕력을 측량하는 데는 답답한 장애물이다. 역시 고수는 함부로 덕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차면 넘치게 된다. 대화 중에도 덕력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일 처음 서브컬처(하위문화)에 빠졌던 것은 게임이었죠.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주셨던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빠져들게 되면서 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 제가 쓰던 컴퓨터 기종이 MSX였는데, 게임 중에 메탈기어라는 것이 있었죠. 코지마 히데오 감독이 지금도 여전히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스테디셀러인데요. 제가 했던 것은 코지마 히데오의 데뷔작이었죠.
메탈기어를 해보고 어린 마음이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게임들은 그저 단순히 적을 부수고 죽이는 내용이었는데, 이 게임은 적을 죽이면 안 되는 거예요. 몰래 잠입해서, 설사 적을 죽이더라도 몰래 뒤에서 소리 안 나게 죽여야 하거든요.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중간에 제가 조종하는 캐릭터가 잡혀서 갇히는 이벤트였어요. 탈출을 했는데 경비견이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경비견이 이 게임에서 가장 어려운 적 중 하나거든요. 얘들을 힘겹게 물리치면서 가다 보면 본부에서 연락이 와요. 계속 경비견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너한테 발신기가 숨겨져 있는지 모르니까 짐을 조사해보라는 거예요. 아이템을 열어보니 정말 발신기가 있는 거예요. 발신기를 버리면 그때부터 경비견이 안 쫓아와요. 메탈기어는 1987년 게임인데 당시에는 이런 스타일의 게임을 본 적이 없으니 너무 센세이셔널했죠."'아리가토'는 '고맙습니다'? 그게 아닌데 좋은 음악을 계속 듣다보면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고, 멋진 글을 자주 읽다보면 나도 한번 멋진 글을 써보고 싶어지듯, 메탈기어는 김완씨에게 좋은 게임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줬다.
게임에 이어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중학교 시절 학교 앞에서 팔던 일본 만화잡지 <뉴타입>의 애독자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중국대사관 주변의 외서 서점을 누비고 다녔다. 당시 자금력이 달려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나 LD를 취급하던 회현상가 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며 웃는다.
게임의 스토리를 만들겠다는 뜻을 가진 소년에게 지름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국어국문학과를 가야 할지 아니면 컴퓨터 계통을 전공해야 될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1996년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나름 전공에 흥미를 느껴 동아리에서 미로 찾는 마이크로마우스를 제작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꿈꾸는 게임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됐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97년에 게임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학을 떠나게 된다.
"드로이얀이라는 게임을 만든 회사였어요. 당시 저는 게임잡지의 필자였는데 드로이얀에 관한 분석 및 공략 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임이 정식 출간되기 전이라 잡지사에서 받은 시디로 게임을 하려는데 실행이 안 되는 거예요. 마침 게임 회사가 가까워서 직접 시디를 들고 찾아갔죠. 그 일이 인연이 돼서 차기작인 드로이얀 넥스트 제작에 참여하게 됐어요.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기획에도 참여해서 캐릭터들의 동작 같은 것도 좀 건드려봤는데요. 그 과정에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든다는 것이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게임을 통해 뭔가를 체험할 수 있어서 즐기는 것이지 게임 스토리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유저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게임요소를 미리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 게임요소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스토리와 세계관을 만들 수 없더라고요. 전에는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생각에 게임의 스토리와 세계관을 우선적으로 고민했거든요.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죠. 게임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게임적 요소를 잘 기획한 후에, 그것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스토리와 세계관을 나중에 설정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게임 개발론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시는 게임에서 퀘스트, 시나리오 같은 것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소설 등의 원작을 받아서 게임을 만드는 경우도 흔했어요. 그런 이유로 회사에서도 게임성보다 시나리오를 우선하는 분위기가 강했지요. 이렇게 게임제작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결국 게임 개발하는 일을 그만두게 됐죠."당시 만화 스토리 작가집단 '혼'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같이 활동하는 동생의 추천으로 처음 번역 일을 하게 됐다. 다년간 쌓은 덕력으로 일본어에는 꽤 자신이 있었고, 번역 의뢰를 받은 만화 <호에로펜>의 주인공이 만화가였기 때문에, 만화 스토리작가인 자신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번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아니 솔직히 어려웠다.
"일본어만이 아니라 국어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국어사전, 일본어사전, 일일사전, 유의어사전을 뒤져가며 작업을 했어요. 저는 번역이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 작가의 문체나 말투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제가 해석해서 한국말로 바꿔야 하잖아요. 그런데 해석 과정에서 아무래도 자꾸 제 생각이 들어가게 되더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가급적 제 목소리는 낮추고 작가의 목소리는 높이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과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역시 국어 실력이 필요하더군요. 적절한 우리말을 찾아야 하니까요. 일본어 번역이란 것은 일본의 문화를 우리나라의 문화에 맞게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 문화와 역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요. 아시다시피 일본의 문화와 역사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잖아요. 결국 문화와 역사의 차이 때문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이 틈을 메우는 것도 번역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자는 일본의 문화도 잘 알고 우리나라의 문화도 잘 알아야 하죠. 번역하면서 늘 배우고 있습니다."그가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 일본학과에 다니는 이유도 일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완씨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사실상 '직역'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리가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맙습니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리가토는 한자로 '有難う'라고 쓰는데 문자 그대로 '어려움이 있다'라는 의미다. 어려움이 있는 게 고마운 것이랑 무슨 상관인가? 누군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 나는 그것을 꼭 갚아야 하니까 '어려움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서도 일본인 정신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안합니다'라고 알고 있는 '스미마셍'도 풀어보면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의미란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했으니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게다. 이런 식으로 언어의 뿌리를 파고들다 보면 결국 '직역'이란 것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아리가토를 '어려움이 있다'로 번역하지 않고 '고맙습니다'로 번역하는 자체가 직역이 아닌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완은 일본어의 본뜻을 잘 살릴 수 있는 우리말을 찾는 데에 온 힘을 쏟는다. 그가 번역가로서 직역보다 의역을 선호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