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교정의 '3.17의거기념비'성남고 학생들은 1960년 3월 17일 서울에서 최초로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김학규
성남고 교가, 친일설립자 숭배로 얼룩지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남고지만, 태생적 한계에 가까운 부끄러운 역사가 학생들이 부르고 있는 교가에 지금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환---한 이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배--움길 여--시니 크신공덕 가이없네성남성남 우리모교 무궁탄탄 할지어다
성남고 교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교 교가에 상투적으로 보이는 무슨 산이나 무슨 강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독특한 교가라고 해야 할까요? 얼핏보면 우선 '원석두님'의 크신 공덕을 칭송하는 대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설립자를 유치하게 칭송하는 대목인데요. 그래서 성남고의 교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남고의 탄생 과정과 그 설립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1938년 2월 성남고등보통학교로 개교한 성남고는 기업가 원윤수((1887∼1940)와 일본군 출신의 군인 김석원(1893∼1978)이 공동설립자입니다. 성남고 재단인 재단법인 원석학원은 원윤수의 '원'자와 김석원의 '석'자를 따서 지은 거지요. 우리 동네 사람 중에도 성남고 설립자를 김석원만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설립자금의 상당수(80만 원)는 공동설립자인 원윤수가 냈습니다.
원윤수는 남대문 잡화상(1907∼), 과일위탁판매업(1915∼) 등을 하다가 일화광업(日華鑛業)을 설립하고 백년광산(텅스텐, 황해도곡산)을 개발하여 더 큰 부를 축적하는데요, 이렇게 쌓은 부를 일본군에 군량미(3,000석)와 비행기 대금으로 헌납하는 등 최창학(경교장 주인), 방응모(조선일보 사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3대 광산재벌로 통하면서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입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인공로자연감"에 353명 중 한명으로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인 1940년에 병으로 일찍 사망한 탓입니다.
김석원 역시 1915년 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부터 보병 소위로 임관해서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때는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올렸고, 1937년 중국침략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회를 같은 일본군 장교였던 이응준 등과 함께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는데요. 김석원의 해방 직전 일본군 최종 계급은 대좌(대령)였는데,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을 역임한 홍사익 중장,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역임한 박병두 중장에 이은 최고위급 인물이었습니다.
김석원은 해방 이후에도 줄곧 성남고의 교육과 운영에 관여하는데요.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복무하다 예편한 1956년 이후부터는 줄곧 성남고등학교 교장과 원석학원의 이사장을 맡습니다. 1978년 사망하면서 학교 뒷산에 묻히는데, 생전에 성남고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잔재청산을 요구하는 항의시위를 하게 되면서 2002년에 철거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제 왜 "환---한 이 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길 여--시니 크신공덕 가이없네"라는 두 친일파 설립자를 추앙하는 내용의 가사가 교가에 담겨 있는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헉! 이런 뜻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