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에세이 : 고전의 끝없는 새로움>(키케로 등저/천병희 역) 겉그림.
숲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이 한 살이 추가되니 50대 중년의 무게를 새삼 느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딜 가도 선배가 많았는데, 요즘 무슨 모임을 가도 내가 선배라고 인사할 사람들이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어머님은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80을 넘으신 지 오래다. 처가의 어른들은 집에서 계시는 날보다 병원에서 보내시는 날이 더 많다. 작년 말에는 대학동기 자녀 결혼식이 있어 참석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신부가 우리 집 큰 애와 동갑이었다. 나에게도 이제 발등의 불이다. 자식의 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불면의 밤이 많아지는 새해다."
생로병사!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주로(走路)이다. 그래서인지 이를 소재로 하는 글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다. 국내에 번역된 키케로의 적지 않은 저작을 읽어 가던 중 이 문제에 대한 2000년 전의 로마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노년에 관하여>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천 교수가 쓴 <그리스 로마 에세이>(도서출판 숲)에 실린 한 편의 글이다.
고전이 알려주는 노년의 가치말이 나왔으니 천병희 교수에 대하여 한마디 하자. 이 분은 그리스 로마 원전을 우리 말로 번역해 온 이 분야의 독보적 인문학자이다. 그는 2013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 윤리철학서 <니코마코스윤리학>을 출간했다. 2009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정치학>을 출간한 지 4년 만이다. 이로써 그는 1976년 번역한 <시학>을 출간한 이래 37년 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3대 명저 모두를 원전 번역했다.
이 외에도 그는 지난 40여 년간 20여 권의 그리스 로마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나같은 비전문가에게 희랍문학과 라틴문학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시대에 이런 인문학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천 교수의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노년에 관하여>에서 키케로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현인으로 추앙받던 대(大)카토의 음성으로 노년, 곧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당시 로마에서 유행했던 스토아 철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니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이해다. 내가 이해하는 한도에서 간단히 이 철학을 설명해 보자.
동서고금을 통해 물질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철학은 정신과 이성, 그리고 영혼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은 원래 알렉산드로스 사후 동서양의 문화가 절충된 세계주의 문화, 헬레니즘 하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시절 서구는 동서양의 교류로 물질적 영화를 만끽할 수 있었던 사회였다.
동서양의 온갖 사치품이 동서 교역로를 통해 들어오자 사람들은 이를 구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자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척도가 되었다.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물질의 이면을 지배하는 법칙, 진리(로고스), 인간의 육신을 뛰어넘는 불멸의 영혼….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인간은 단지 물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고로 세상(물질)은 신적 이성과 일치해야 하며, 인간은 자연과 화합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따른다는 말은 결국 신의 뜻에 따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육체는 일시적이지만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정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성과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주장했다.
위와 같은 철학이 키케로가 활동한 기원전 1세기 로마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로마가 제국화하면서 물질주의가 급격히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과도한 물질주의에서 로마의 향락문화가 독버섯처럼 일어났고 그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사회의 한편에서 강력히 분출되었다. 이것이 로마에 스토아 철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스토아 철학은 로마의 기독교 발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물질에서 영혼의 세계를 극대화한 종교다. 그러니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스토아 철학에서 강조하는 물질에 대한 금욕과 인류애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말이다.
노년의 비참함에 대한 4가지 질문... 카토의 답변<노년에 관하여>에서 현인 카토는 사람들이 노년이 비참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네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면서, 그에 대해 답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질문한다. '노년은 우리를 쓸모없게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명하다. "전혀 염려할 것이 없다. 노년은 노년대로 쓸모 있는 게 인생이다."
"큰일은 체력이나 민첩성이나 신체의 기민성이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따라 이루어지지. 그리고 이러한 여러 자질은 노년이 되면 대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난다네.(중략) 한창 때의 젊은이들은 경솔하기 마련이고, 분별력은 늙어가면서 생기는 법이라네." - <그리스 로마 에세이>, 409, 4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