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에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어요

[경상도 여자의 전라도 생활 이야기] 시장에서 만난 엄마

등록 2014.01.05 19:53수정 2014.01.0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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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는 오일마다 열리는 장터를 찾아가는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은 4, 9일에 장이 열린다. 도시의 재래시장같이 가게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지 않고 넓은 간격을 두고 듬성 듬성 좌판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의 수가 적다보니 시장 또한 규모가 작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로 별로 없고 이용객의 수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장이 열리는 시간도 늦고 장을 파하는 시간 또한 빠르다.


a 장터 거리 장이 열렸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산해도 너무 한산하다.

장터 거리 장이 열렸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산해도 너무 한산하다. ⓒ 김윤희


도시처럼 다양한 물건을 만날 수는 없지만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은 이곳에 오면 다 살 수 있다. 장터에만 오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생선 가게 옆에 햇살을 받으며 늘어져 있는 말린 생선들이다. 철따라 잡히는 것이 다르겠지만 항상 볼 수 있는 세 가지 생선이 있다. 그것은 갈치 새끼 말린 풀치, 날씬한 광어를 연상케 하는 서대, 몸이 길쭉한 갯장어다. 이것들은 장에 올 때마다 일렬로 줄지어 널어져 있다.

시골 시장에서는 도시의 재래시장에서 볼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뻥튀기를 하는 아저씨다. 아주머니들은 뻥튀기 차가 오기도 전에 집에서 말려온 것들을 들고 줄을 선다. 차가 오기 전에 찬찬히 장을 보고 나면 사람 대신 줄을 서 있던 것들을 뻥튀기 아저씨는 차례대로 기계에 넣어 튀겨 낸다. 그러면 장보기를 끝낸 아주머니들은 자루를 가져와 그것들을 담아가는 것이다.

옥수수에서부터 돼지감자까지 말려진 것들은 튀겨지면 고소한 향기를 뿜어냈다. 튀겨낸 돼지감자는 차로 끓이면 그 맛이 둥글레차와 비슷하지만 그 맛의 깊이는 돼지감자를 못 따라간단다. 이곳에 와서 처음 알게 된 돼지감자는 모양이 정말 돼지의 발처럼 생겼다. 이것은 갈아서 마시면 먹을 만 하지만 쪄서 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옛 어른들은 돼지에게 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a 뻥이요~ 튀겨진 뻥튀기가 기계에서 나와 담고 있다. 한 아저씨는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고 또다른 아저씨는 흘려놓은 튀기를 주워먹기 바쁘다.

뻥이요~ 튀겨진 뻥튀기가 기계에서 나와 담고 있다. 한 아저씨는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고 또다른 아저씨는 흘려놓은 튀기를 주워먹기 바쁘다. ⓒ 김윤희


아주머니들 틈새에 서 있는 한 아저씨는 뻥튀기 기계가 흘려놓은 것들을 주워 먹으며 줄얼거리셨다.

"내 차례는 언제 오는 겨? 미치것구만 내껀 언제 하는 겨?"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기계가 거대한 소리를 토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뻥튀기 기계는 요란하지 않고 얌전했다. 소리도 없이 튀겨진 것들을 밖으로 밀어내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뻥튀기 기계를 보면서 나도 세월을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외출을 한 김에 다른 고장의 재래시장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이십 여 분을 가면 고창읍이 나온다. 그곳 재래시장은 다른 곳보다 규모가 켰고 유동 인구도 많았다.


재래시장을 구경하자니 자꾸만 배가 고파왔다. 밥을 든든히 먹고 왔어도 시장에만 오면 배가 고팠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시장을 돈 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시장 팥죽이라 글자를 세겨진 가게 문 앞에 섰다. 가게인지 사람이 사는 공간인지 출입구로는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유리문에 시장 팥죽이라고 써 있으니 팥죽을 파는 가게일 것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메뉴판도 없고 일반 가정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가 팥죽 가게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상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가게이자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만 36년째 팥죽을 팔고 계신다고 했다.

칠년 전, 친구와 전남지방을 여행 할 때도 재래시장을 찾았었다. 그곳을 둘러 본 후에 우리가 먹은 것은 팥 칼국수였다. 친구도 나도 처음 먹는 음식이었다. 그 맛은 달콤하기도, 고소하기도, 담백하기도 한 것이 '이 맛이야' 라고 단정할 수 없는 묘한 맛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때의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주인 할머니가 일단 앉으란다. 부엌을 겸한 거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다. 그 위에는 가정용 주전자 하나와 오래된 수저통이 놓여 있었다.

일반 식당처럼 '어서 오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이러한 인사도 없고 물을 마시라고 컵을 주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할머니의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어 잊어버린 듯했다. 손님 중 한 분이 싱크대에 서서 쭈꾸미를 손질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자리에 앉아 까놓은 배를 먹고 계셨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어색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으로 할머니의 동선을 따라갔다.

할머니는 싱크대 앞에 서서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켰다. 그리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반죽해둔 밀가루를 긴 봉으로 문질러 넓게 펼쳤다. 펴놓은 반죽을 돌돌 말더니 식칼로 툭툭 썰었다. 손으로 만든 칼국수의 굵기가 제각각이다.

수타면은 제멋대로 생겨야 맛나긴 하다. 할머니가 썬 칼국수를 들고 문밖으로 나가더니 연탄난로 위에 있던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끓고 있는 팥죽 속으로 들어가는 면을 보자 침이 절로 고였다. 할머니가 팥 칼국수를 만드는 동안 다른 할머니는 삶아낸 쭈꾸미를 소쿠리에 건져내어 먹기 좋게 자르셨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두 할머니를 보자니 가게에 들어왔다기보다 할머니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팥 칼국수를 내려놓으며 할머니가 많이 먹으란다.

"부족하면 더 줄것잉께."

적갈색 팥죽 속에 길게 늘어진 칼국수 가락이 뽀얀 살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들자마자 허겁지겁 입안으로 그것을 집어넣었다. '후루룩. 후루룩. 사각 쩝쩝.'

할머니가 담갔다는 사각거리는 김치와 부드럽게 넘어가는 칼국수, 텁텁함을 없애주는 동치미까지 환상적인 맛의 조화였다. 나는 팥 칼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김치를 세 접시나 먹어치웠다.

"나는 많이 먹어주는 사람이 좋아. 더 먹어."
"네, 정말 맛있어요. 이 김치, 자꾸 손이 가요.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는지..."
"아므, 난 잘 먹어주는 사람이 좋당께. 잘 먹으니 좋와. 사각거리지? 적게 절이면 고롷게 사작 거리제. 사람들이 우리 집 김치 참말로 맛나다 혀. 얼마든지 줄 수 있승게 묵어."

할머니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며 뿌듯해하셨다. 우리가 식사를 끝낼 때쯤 테이블 위로 쭈꾸미가 담긴 접시가 올라왔고 할머니들 앞으로 작은 소주 잔이 하나씩 놓여졌다. 쭈꾸미를 가져온 할머니와 주인 할머니는 오랜 친구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먹으려고 직접 사 오신거라고 귀띔해주셨다.

우리로 인해 술자리가 불편해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쭈꾸미를 사 오셨다는 할머니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소주 한잔하고 가라셨다. 낯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잔을 건네주는 할머니의 성의를 거절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따라 주었고 나는 단숨에 들이켰다.

"오메, 뭣이든 잘 먹고 말도 이쁘게 하고 우리 딸 삼았으면 좋겠구만. 한 잔만 주면 정 없제. 한 잔 더 받게."

'아닙니다. 제가 칼국수를 많이 먹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두 잔째 술은 이미 내 위장을 통과하고 했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쭈꾸미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부끄러워 말고 마이 묵어. 딸 같아서 그랴. 참말 딸 삼고 싶으네."

나는 이쁘다는 말에 입을 헤벌쭉 벌리며 쭈꾸미를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딸 같다는 말을 계속 하시며 엉덩이를 토닥이셨다. 그날 내 엉덩이는 호강했다. 할머니의 스킨십이 좋았다. 낯선 이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계속 술잔을 돌고 돌았다. 들뜬 나는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세 명의 할머니와 손님 두 사람이 잔을 주고받았더니 소주 두 병이 금세 비워졌다.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옆집 슈퍼로 가서 소주 두 병을 사왔다.

"저희들이 많이 먹었잖아요. 이거 더 드셔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메, 참말로 어쩨 스까나. 이쁜 것이 하는 짓마다 이쁘네."
"뭣이여. 더 먹고 가. 같이 시작 했는디 끝도 같이 맺어야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승게 우리도 인연이 아니 것는가. 그냥 안거."

나는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먹여주는 쭈꾸미에 소주를 마셨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시장 통에서 만난 할머니의 정에 취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나이가 몇인지, 어디에 사는지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리고 옷을 뒤적이시더니 핸드폰을 꺼내셨다.

a 전화번호 부른다. 팥죽집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내 딸을 하자며 번호를 받아가라 하시기에 부르는 번호를 저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가게지만 아무리 보아도 가정집 같다.

전화번호 부른다. 팥죽집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내 딸을 하자며 번호를 받아가라 하시기에 부르는 번호를 저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가게지만 아무리 보아도 가정집 같다. ⓒ 김윤희


"딸! 주소랑 연락처 알려줘. 주고 싶은게 있응게. 냉도 알려 줄 텐께."
할머니의 성함은 강○○. 나는 할머니의 이름 뒤에 엄마라는 글자를 처넣고 저장버튼을 눌렀다. 

"전화 혀봐. 나도 번호를 저장해야 하제."

이것을 보시던 주인장 할머니는 자신의 번호도 가져가라며 번호가 적힌 노트를 내게 내미셨다.

"읍내 나오면 또 와이. 내 핸펀이 가게 번호여. 엄마라고 생각 혀고 편하게 와."

나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장 통을 빠져나오다 뒤돌아 팥죽집을 바라다보았다.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고는 팔을 흔들어 대고 계셨다.  오래전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는 엄마 아빠가 더 많으면 좋겠다. 얼마나 좋노. 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도 아이고 억수로 많으먼. 상상만 해도 기분이 쩨진다야."   
#시장 #팥칼국수 #할머니 #딸 #뻥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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