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 서울지하철 종각역 옆에 있다.
김종성
매년 12월 31일 밤마다 제야의 타종 행사가 열리는 서울 종로 보신각(종각). 현대인들은 이곳을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곳을 바라보는 마음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주만물을 대표해서 시간을 지배하는 조선 주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 따르면, 왕은 우주 주재자인 신을 대리해서 모든 사물을 관장했다. 왕이 관장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국가가 종을 관장하고 시간을 공지한 것은 시간이 왕의 관할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한양과 지방의 종각은 이런 배경에서 세워졌다.
한양의 종각은 태조 이성계 때 세워졌다. 처음에는 지금 위치의 근처인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지금의 자리로 이동한 것은 제3대 태종 이방원 때였다. 한양 종각은 조선 후기인 광해군 때 2층 건물이 됐고, 고종 때 보신각으로 개칭됐다. 지금의 보신각은 1980년에 복원된 것이다.
한양 사람들의 일과는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마무리됐다. 왕의 책임 하에 국가는 밤 10시께 28회 종을 침으로써 통행을 금지하고 하루 생활의 끝을 공지했다. 새벽 4시께에는 33회 종을 침으로써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하루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한양의 경우, 서대문과 동대문의 직경은 대략 4~5km다. 이 정도 거리면, 보신각 종소리가 한양 시내 전체를 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출근하다 졸음운전을 하기도...국가가 새벽부터 종을 울려댔기 때문에, 옛날에는 '아침형 인간'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일출 시각에 근무가 시작됐기 때문에, 새벽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벽에 식사하고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이런 풍경이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 임금의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심환지는 정조가 죽은 뒤 정조의 개혁을 송두리째 파괴한 보수파 거두였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을 때는 정조와의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다. 급사하기 3년 전인 정조 21년 5월 5일(음력) 즉 1797년 5월 30일(양력)이었다. 이 해에 정조는 46세이고 심환지는 68세였다.
이날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조는 "늘그막의 체력으로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기 어려울 터이니, 내일 비변사 회의 때 병을 핑계 대고 집에서 쉬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새벽에 출근하던 당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아침형 인간이었지만, 개인적 습관이나 갑작스런 사정으로 새벽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새벽 출근이 고역이었다. 저명한 학자이자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는 선조 임금의 승지(비서)인 민기문이 "새벽 종소리를 듣고 대궐로 출근하다가 말 위에서 졸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출근하다가 '졸음운전'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졸음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커브 길에서 졸음운전을 했다가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지만, 이때는 '자동차(말)'에 자동센서가 있어 커브 길에서 '자동차'가 스스로 회전을 했다는 점이다.
보신각종 치는 일, 왕 권위와 직결되는 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