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망 어선 안강망에서 고기를 따고 있는 모습
이재언
화전놀이가 일주일씩 이어지고 수백 년간 충신 이대원 장군을 추모하며 제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섬주변의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손죽도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 할 정도로 어족 자원이 풍부했다.
재래식 어구법을 벗어나 기계화된 어업이 시작되었던 일제강점기 손죽도의 경제는 중선배에서 시작되었다. 중선배란 이름은 우리나라의 전통어구인 중선망을 이용하여 이름 붙여진 고기잡이 방법으로 바다에 닻을 내려 어선을 고정시킨 뒤에 양쪽 현(舷)에 딸린 어망 2통을 펼쳐 조류를 따라 움직이는 어류를 잡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흐름을 이용한 어법이므로 주로 서해안에서 사용되었으며 주요 어획물은 조기와 새우였다.
이 방법이 개량화 된 것이 안강망이란 어구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아귀를 뜻하는 한자인 안(鮟)자와 강(鱇)자를 사용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물속에 아귀의 입을 벌린 것처럼 고정된 닻에 큰 입을 벌린 그물로 고기를 유인하여 잡는 방법 때문에 안강망이라 이름 붙여진 일본식 이름이다. 손죽도의 중선배가 가장 많았던 때는 일제 후반 해방 직전으로 알려진다. 1920년대부터 도입된 신식 어구가 1940년대에는 절정을 이루어서 손죽도지에 55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선원들의 대우가 좋아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300여 가구에 500여세대가 살았고 1가구에 2~3세대가 사는 집이 많을 정도였다.
육지에서 먼 섬에 위치해 있다 보니 손죽도 사람들은 일찍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풍선을 타고 서해의 위도와 연평도까지 진출하여 뱃길을 열고 어장을 개척했다. 농사가 최고인 시절에 전답이라곤 하나 없고 육지의 한 사람의 땅도 안 되는 작은 섬에서 천여 명이 살았으니 오직 바다 개척만이 살 길이었다. 그때는 동력선은 상상도 못했기에 바람 따라 물때 따라 가는 풍선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조류를 이용하여 항해를 하여야만 고생을 덜 하고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험한 바다를 누비고 다녔던 그 시절 사람들은 봄에는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불고 겨울에는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오기에 계절에 따라서 항해를 하고 고기를 잡아야 했다. 일기예보도, 해도(바다 지도)도 없고, GPS(위성항법장치)는 당연히 없었을 그때 사람들은 오로지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여 안개와 암초와 파도와 풍향을 꿰뚫어 보고 지형지물을 숙지하여 바다로 나섰다. 그렇게 생존 전략 차원에서 항해술을 익히며 살았지만 지리적으로 워낙 풍랑이 거센 먼바다의 섬이기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섬과 섬의 교류 역사를 가진 손죽도 그럼에도 삼산면에 있는 먼섬 손죽도와 초도와 거문도가 다른 지역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삼산면지(2000. 12,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보면 울릉도와 거문도의 교류는 1970년대까지 이어져 오징어 어획 철이면 많은 배들이 울릉도 어장에 진출하여 오징어를 잡았다. 이러한 어로 행위는 조기 철이면 황해안의 위도, 군산까지 진출하였으며 멀리는 황해도 장산곶까지도 다녀왔다고 전해진다.
특히 황해안까지 출어 한 것은 중선배가 많았던 손죽도에서 주로 이루어 졌는데, 손죽도의 중선배 조업은 설을 지내고 나서 흥양바다(손죽도 주변바다)의 조기잡이부터 시작되었다. 아랫역(흥양바다)에서 조업을 할 경우에는 조금 때를 맞추어 며칠씩 고향에 돌아올 수 있지만 웃녁(연평도, 칠산 앞바다 등)에 출어할 때는 몇 개월씩 고향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영광 법성포 앞바다, 칠산 앞바다로 이동하면서 조업하고 조기들이 산란하는 연평도 부근까지 출어하였다.
봄철에 조기들이 산란을 마치고 회유할 때부터 손죽도를 향해 남하하면서 조업을 하고, 흑산도 근해에서 강달이 조업을 마친 후 조금이 되면 신안군 비금도에서 손죽도 배들이 서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렇게 올린 수확으로 보리 등 생필품을 구입하여 음력 6,7월경 손죽도에 귀향하면 약 반 년이 걸렸다. 이후 1개월 정도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가을철에는 진도 조도 앞바다, 추자도 근해, 부산 가덕도 등에서 갈치 잡이를 하였는데 이때 올린 수입으로 생필품과 볏집 등을 구하여 가옥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업 구역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1960년대 중반 평화선이 한일 어업협정으로 없어지고 연평도 조업이 묶이면서 동지나해로 출어 구역을 변화시켰다.
슬픈 바다 역사를 가진 섬마을 요즈음처럼 선박의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그래서 여느 섬이 그러하듯, 손죽도에도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1950년대 말 2월에 손죽도와 초도 사이에서 노 젓는 배로 낚시를 하는데 갑자기 부는 샛바람 때문에 대부분 초도로 대피항하였으나 그중에 배도 크고 경험이 많은 여섯 명이 탄 배 한 척이 손죽도로 오다가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1959년 9월 추석 무렵, 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 때 부산 근해로 갈치 잡이를 갔던 손죽도 배 두 척이 침몰하였다. 한 배에 일곱 명씩 탔는데 한 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열세 명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는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갔다가 배가 침몰하여 여섯 명 중 한 명이 살아남고 다섯 명은 수장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에는 동지나해로 조업을 나갔던 배가 초가을 손죽도 마을 사람 8명과 함께 바다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두 명의 어부들이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셀 수 없이 많아 손죽도에는 슬프게도 이렇게 제삿날이 한날이 되는 날이 일 년에 네 번 있다고 한다. 동력선이 생긴 후에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동력선이 없던 아주 옛날부터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니 그들의 용기가 대단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손죽도에는 과부가 많고 자연의 두려움이 컸기에 우상 숭배가 심하였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고 동력선이 생겨 불편한 섬보다 문화가 발달한 도시에서 얼마든지 배를 타고 집에서 드나들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으로 유명한 섬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어부들이 섬에서 생활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훗날 여수가 우리나라 수산업과 원양어업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손죽도를 비롯한 주변 어장의 경험과 자본이 어울러져서 축적되어 이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손죽도 개요●손죽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으로 여수에서 약 74㎞, 면소재지인 거문리에서는 북동쪽으로 28.3㎞ 떨어져 있다. 면적 2.919㎢, 해안선 길이 11.6㎞이다. 인구는 91가구 194명(2010년)이다.●손죽도 가는 길 여수 여객선터미널 1일2회 운항(소요 시간 1시간 20분) - 출항 시간 07:4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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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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