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에 앞서 고향에 전화하는 술리스. 귀국 사실을 알리며 행복해하고 있다.
고기복
떠나기에 앞서 출국신고를 하며 술리스는 30분 이상을 마음 졸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출국 항공편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출국 신고하는 곳에는 많은 이주노동자로 붐볐다. 번호표를 뽑고 한참 줄을 서 있던 술리스는 출국신고서를 내자마자 퇴짜를 맞았다.
"불법체류 기간 동안 일했던 회사 이름과 주소, 연락처, 근무기간을 적으라"고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볼펜으로 지시를 내렸다. 술리스는 그 순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근무했던 업체 이름을 적는 순간, 그곳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는 단속에 걸려 강제 추방되고, 사장은 벌금을 물게 된다.
떠나는 입장에서 술리스는 모른 척하고 적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3년이나 일했는데 퇴직금 한 푼 주지 않은 사장을 생각하면, 적어도 양심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신과는 한 직장에서 3년 동안 같이 먹고 자며 일한 친구를 떠올리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알고 지낸 시간을 합치면 8년 세월을 서로 의지하며 지낸 사이로, 혈육보다 더한 정을 나눈 친구다.
자신이 취업업체와 연락처를 적는다는 것은 결국 프락치가 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팔아넘긴 파렴치한 배신자라는 낙인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술리스는 출국신고를 퇴짜 맞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다시 번호표를 뽑았다. 이번에는 불법체류 기간 동안 머문 지역명을 기록했다. 취업업체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다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볼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며, "여기에, 여기에 써서 오세요"라고 하며 간단하게 퇴짜를 놓았다.
매번 번호표를 뽑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퇴자를 맞으면 비행기를 놓치겠다는 생각에, 순간 조바심과 함께 "뭐, 어때, 어차피 떠나는 몸인데, 내가 쓴 줄도 모를 텐데"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술리스는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몇 차례씩 퇴짜를 맞는 것을 보며, 묘안을 짜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순간 자신의 지갑에 있는 명함이 떠올랐다.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받은 인력사무소 명함이었다. 인력사무소 소개로 추석을 앞두고 재래시장에서 설거지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결국 술리스는 취업업체에 "OO시장"이라고 쓰고, 지역명만 적어 냈다. 세 번째로 출국신고서를 받아든 직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장, 어디? 이름 있을 거 아냐, 이름. 거기서 뭐했어요? 얼마 동안? 전화 번호 없어?"라고 했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짜증내듯 쏘아댔다. 그런 출입국 직원 앞에서 술리스는 오금이 저렸다. 자연스레, "몰라요"라는 말이 나왔다. 반복되는 질문에도 "몰라요"라는 답변이 계속되자, 출입국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신고를 받아줬다.
한편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한 번 퇴짜를 받고 나면, 고분고분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고, 출입국 직원은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컴퓨터로 옮겨 적는 작업을 반복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교묘한 폭력
삼십 분 넘게 출국신고를 위해 허비한 술리스는 부랴부랴 여행사 직원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항공수속 절차를 여행사에서 미리 마무리했다. 그제야 술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좌석 번호가 찍힌 항공권과 여권을 돌려받은 술리스의 표정은 편해졌다. 이제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술리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 회사 이름 쓰라고 했을 떄, 쓰고, 친구에게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이 있을 거라고 전화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그렇게 그만 둔다고 하면, 회사가 안 믿어요. 친구가 회사 허락 없이 그만 두면, 회사에서 월급도 안 줄 거고요. 퇴직금도 안 주는데, 월급을 주겠어요? 친구가 불쌍하잖아요."술리스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는 게 아니다.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신고서에 불법체류 기간 동안의 취업 업체와 연락처를 적게 하는 걸 폐지하지 않는 이상, 프락치는 양산될 수밖에 없다.
출국 항공기를 놓치는 시간적 한계와 출국이라는 안도감 뒤에 찾아오는 인간적 이기심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검거하려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행태는 명백한 인권유린이고,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행위이다.
<자유론>을 쓴 스튜어트 밀은 "국가의 법률이나 사회적 도덕 판단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하루 빨리,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할지라도 양심의 자유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법무부 "체류행적 조사는 당연한 절차" |
이 문제와 관련 법무부 이민조사과의 한 관계자는 "불법체류자는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한 사람이고, 관련 내용을 조사할 때 체류행적을 알아보는 건 통상적이고 핵심적인 과정이다"며 "국가 처지에서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실정법을 위반했으면 조사와 제제를 하는 건 당연한 절차"라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외국인 노동자 등 불법체류자들이 자발적으로 출국을 하면서 체류행적 등을 제대로 밝히면 벌금이 줄고 재입국금지 기간도 축소된다"며 "출국 전 공항에서 체류행적을 적게 한다고 해서, 곧바로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업체를 조사하고 동료 외국인 노동자를 체포하는 건 아니다. 포괄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체류자 관련 정책을 수립할 때 '체류행적 자료'를 활용한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인권단체 등에서는 체류행적 조사를 인권침해라고 주장하지만, 국가 처지에서는 당연한 법과 절차를 집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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