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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어떤 수식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중한' 기억, '씁쓸한' 기억, '자질구레한' 기억, '지우고 싶은' 기억. 이 중 지원하는 부서에서 원할 만한 기억을 선별해야 한다. 단지 기억만 나열해서는 안 된다. 기억 속에 평소 인간과 사회의 총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은근슬쩍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까 기억도 필요하다면 보험처럼 갱신해야 한다.
필자(취업준비생)와 독자(인사담당자)사이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필자와 독자는 오해로 점철된 관계다. 필자에겐 '최초의', '신선한', '깜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독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읽어버린다. 쓰는 이와 읽는 이의 필연적 갈등이자 비극이다.
따라서 인사 담당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싶다면 내가 쓴 기억에 '기업마인드'를 덧붙여야 한다. 이 순간부터 '자기 소개'를 떠나 누구에게나 통할 법한 그럴 듯한 이야기로 바꿔야 한다. '나'를 결코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데도 마치 제 삼자가 나를 들여다본 양 서술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쓰면서 기억이 왜곡되고 '자아'가 분열되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의미가 빠진 자리에는 계량화가 들어찬다. 이 기사 속에 등장하는, 한 대기업 인사개발팀 담당자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엑셀로 돌린다. 그래서 중요한 키워드 안 들어가 있는 글은 거른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학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에는 지금까지 말한 '기억의 편집'외에도 몇 가지 지침이 있다.
본인만의 스토리, 제한된 분량 안에서 풍부한 이야기, 원론은 금물, 군대 일화 금지, 경험·과정·느낌을 구체적으로, 두괄식, 본인'만'의 생각, 팩트 중심과 논리 그리고 정확한 표현….
숨이 찬다. 근데 자기소개서를 읽는 인사담당자들은 진짜 이 지침대로 글을 평가할까? 그 많은 소개서를 다 이 지침대로 평가한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김원진 기자의 글은 자기소개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씨는 자기소개서를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학 양식이라고 했다. 자기소개서를 문학에 비유한 것이다.
'서사'를 고문하는 시절, 뜻하지 않게 '문학'에 입문해 기억을 습작해야 하는 수많은 취업준비생들. 달리 해줄 말이 없다. 그저 '힘내시라'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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