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재은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오디오와 차 그리고 음반이다. 과거 오토바이에 빠진 적도 있다고 한다.
유순상
하지만 아버지는 막상 권재은이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격렬히 반대했다. 권재은은 열예닐곱 살 무렵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아 몰래 상경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 년치 대학 등록금쯤 되는 돈을 챙겨들고 나온 것이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서울 종로에 있던 청구고전학원이었다. 그곳에서 무형문화재 벽파 이창배 선생으로부터 경서도 소리를 사사했다.
22살에 한국방송공사(KBS) 민요백일장에서 최연소 연말장원, 이듬해 전국 민요경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잇따른 수상으로 '명창'이란 수식을 달고 다니게 됐다. 이후 '권재은 소리뎐 만화방창' 등 크고 작은 발표회와 각종 행사에서의 공연, 2장의 음반 발표 등 음악인생을 이어왔다. 하지만 권재은은 계보가 중요한 소리계에서 스승에게 배우는 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 배운 시간이 전부 모아도 3년이 안 돼요. 한 선생님께 소리를 꾸준히 배우면 한 색깔인데,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 나중에 색동저고리처럼 부분적으로 표시가 나거든요. 난 누구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대신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돌아다니며 민요채록을 했어요." 암울했던 시대, 광장을 누비다 권재은은 민요대회에서 수상한 뒤 24살부터 집회 현장을 다녔다. 1989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지 자선공연인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건국대 충주 캠퍼스를 시작으로 전국 28개 대학에서 순회공연했다. 가수 정태춘과 <통일비나리>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기존 비나리(재앙과 액을 멀리 물리치고자 하는 굿소리) 선율에 창작한 사설을 얹었다. "이 구석에서 퇴폐살, 저 구녕엔 향락살, 이 마당에 사대살, 저 바닥에 종속살…" 시쳇말로 '라임(운율)'이 딱딱 맞는 공연이었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기금마련을 위한 공연도 했다. 민예총 충주 초대지부장도 맡았다.
"자연스러웠어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으니까. 음악하는 사람들하고 문학하는 사람들, 종교인들이 자주 만나잖아요. (유신에 저항했던) 지학순 주교와 '한살림'을 만들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뵀으니까요.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꽹과리를 들고 나서게 되고. 그 당시에는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귀라도 즐겁게 해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는 전담 경찰관도 생기더라고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농무'의 민중시인 신경림이다. 신경림은 자신의 책 <사람 사는 이야기>에 권재은 얘기를 썼다. "그가 꽹과리를 치고 나서면 망설이던 지역민들이 따라 나서서 절로 데모가 형성되고는 했다." 권재은이 1994년 이후 충주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 지역 출신인 신경림 시인이 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재은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소리를 시작하고 계속 힘들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집을 나온 뒤 중국집과 일식집 종업원,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징이나 꽹과리 깨진 것을 팔아서 차비로 쓰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계속 어렵다 보니 결혼 생활도 금이 갔다. "이혼의 후유증이 십 년을 가더라"고 권재은은 씁쓸하게 말했다. 전처와 사이에서 난 두 딸은 출가를 했고, 권씨에게 소리를 배우다 결혼한 현재의 아내는 충주시내에서 전통소리 강습장을 하며 열세 살짜리 아들을 키운다. 권씨는 소리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산 속에서 '독거노인'처럼 산다고 말했다.
싸이 음악도 좋아하는 오디오광권재은의 방은 고서적과 음반으로 가득하다. <목민심서>와 <초한지>, 각종 인문교양서 등 어지간한 도서관 못지않다. <수궁가>(토끼의 간을 빼앗으려는 자라와 꾀로 모면하는 토끼 이야기) 중 <약성가>(도사가 용왕에게 약을 일러주는 대목)를 이해하기 위해 한의학 책을 파고들었다. <적벽가>(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는 내용)의 전쟁 얘기를 표현하려니 무기 공부가 필요하더란다. 평소에 쌓아 둔 문학적 내공은 찰나의 감동을 단단히 붙잡아 두는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