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 만드는 송정댁
김영희
날이 지나면서 이집 저집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메주가 눈에 들어왔다. 짚으로 묶고 그 위에 다시 양파망을 씌워서 매달아 놨다. 파리나 벌레도 막고 특히 고양이가 못 먹게 하려는 장치인 모양이다. 김씨 아저씨네 옥상 비닐하우스 속에도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내맘대로 연심이네만 믿고 있었다. '연심이네가 메주를 쑬 때 그 옆에서 따라서 해야지.'
"아니, 어째 그렇게나 몰라. 아무리 일을 안해봤어도 들은 것은 있을 텐디." 마을회관에 모여앉은 할머니들이 드디어 내게 포문을 열었다. 나이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김장도 혼자 못한다, 메주도 못쑨다, 만날 할 줄 모른다고 쩔쩔 매고만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이상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제가 그동안 외국에서 많이 살았잖아요. 한국에 잠깐 들어와도 정신없이 있다가 또 외국으로 가고요. 그래서 통 뭘 몰라요." 나는 할 수 없이 내 살아온 이력을 핑계로 내세웠다. 아무리 이리저리 다니며 살았어도 하려고 들었으면 왜 못했을까. 그동안 게으르게 살아온 핑계일 뿐이다.
"오, 그렇기도 허겠네. 긍께 한국에 잠깐 오먼 친정집 온것 마냥 그랬것네." 할머니들은 다행히 내 핑계를 해석까지 해가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철에는 다들 바빠서 사람구경 못하는 마을인데, 겨울이 되니 뜨뜻한 마을회관에 모여서 점심도 같이 해먹고 저녁도 같이 먹는다.
"낼 연심이네 메주 쑨다는디." 저녁을 먹고 나자 누군가 큰소리로 귀띔 했다. 웃기 잘하는 연심이네는 웃고만 있다. '그까짓 메주 쑤는 것을 뭣하러 남한테 말을 해야' 하나…. 회관에 모여서도 늘 뒷전에 말없이 얌전하게 앉아있기만 하던 송정댁할머니가 처음으로 앞으로 나앉았다.
"내가 한마디 할라요. 연심이네 메주씀서 저 집 메주도 같이 쒀. 불 땔 나무는 내가 주께 연심이네 나무 쓰지 말고 우리집에서 가꼬가서 때고." "그래 좋은 일 한다하고 저 집 것도 같이 쒀."송정댁할머니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거들고 나섰다.
"그래야 쓸랑갑네. 그럼 저녁에 콩 가꼬(가져) 와보쇼이. 당가놓게(물에 담궈놓게)." "그께요이." 드디어 떨어진 연심이네 말에 나는 옳다구나 얼른 대답했다.
"그 집 메주 걱정에 새벽 세시에 일어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