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애윤선애는 최근 공연을 꾸준히 갖고 있다. 경부 상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기념 촬영하는 모습이다.
김대규
사회 변화가 빠른 한국 사회에서 팔십 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민중가요'는 세대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김태형은 신간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주로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를 '민주화 세대'라 하여 전후 50년대 생을 다수로 하는 '좌절세대'와 70년대 생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화 세대'와 구분하였다. 그만큼 80년 5월은 세대를 가를 만한 '사건'이었다.
격동의 80년대에는 제한된 공간에서 소리죽여 부르던 노래들이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학생과 일반 대중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 무렵에 비로소 '민중가요'가 민중의 정서를 갈무리하고 시대적 갈망을 담지 하는 수단으로써 사회적 생명을 획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민중운동'의 성장은 노래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활동 가능성을 부여했다. 노래패가 조직되었고, 녹음테이프와 음반 그리고 공연을 통해 폭넓은 대중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노래패 중 민중문화운동연합 음악분과 '새벽'은 대중성 확보라는 점에서 선도적이었다.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사계', '선언', '철의 기지', '잘 가오 그대' 등 수많은 새벽의 창작곡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새벽'의 대표곡들을 불렀던 대표적인 가수가 바로 '윤선애'였다.
새벽의 해체와 러시아에 관한 명상 윤선애는 대학에 입학하여 노래패 '메아리'에 가입했다. 그녀가 대중 앞에 처음 선 무대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출범하는 기념식이었다. 작은 체구에 수줍은 몸집이었지만 맑고 힘찬 목소리로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 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로 시작하는 '민주'를 노래하면서 삼만 청중을 사로잡았다. 노래의 강한 울림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멈춰서 귀를 기울일 정도여서 지금껏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가끔 만나는 사람 중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때 그 소리 때문에 아직도 활동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지라고 떼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윤선애는 1986년부터 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 '새벽'에서 활동하면서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저 평등의 땅에,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등 주옥같은 대표곡들을 불렀다.
특히 민중가요 사상 역사적인 음반으로 꼽히는 '민문연 12집'에 실린 노래 '새벽, 저 평등의 땅에'(1988)는 대중에게 윤선애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 밖에 윤선애는 '노찾사' 공연에도 객원으로 자주 참여하면서 관객들을 만났다.
그러나 민문연 음악분과 '새벽'은 1993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해체되던 무렵 노래극 <러시아에 관한 명상>을 끝으로 구성원들이 하나 둘 노래 현장을 떠나면서 해체되었다. 가수 정태춘은 이 시절을 <사람들>이라는 노래에서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거리에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아 흙바람(중략)새벽의 대표 작곡가 문승현이 쏘련으로 가던 그 무렵을 윤선애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새벽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 휑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을 때 피아노, 신시사이저, 녹음기 등 말없이 구석에 박혀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나도 노래를 정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윤선애는 새벽이 해체된 이후에도 노래의 끈을 아주 놓아 버리지는 않았다. 십여 년 '정가(正歌)'를 배우고 불렀다. 긴 호흡으로 느리게 '시조(時調)'를 부르며 편안함을 얻었다고 한다.
음반 '하산' 발매와 노래 활동 재개하는 윤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