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중인 김병희 대표.한번 작업하기 위해 앉으면 7~8시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재용
그의 도전 정신과 창의성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이 길러준 것일까?. 그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제주도 사람이다.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농사를 지으세요. 어렸을 때부터 제주도의 들판을 뛰어 다녔지요(웃음)." 지금도 말투에는 제주도 사투리가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제주도에 살다 전라도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생전 처음 뭍으로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서울에 언니도 있고 해서 서울로 왔어요. 도예 공부를 계속하면서 공방과 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도예를 가르치다가 일본에 가게 된 거예요. 공부를 더 해서 교수를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그는 도쿄에 있는 일본사무교육어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지역에 있는 문성예술대학교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전시회도 했다. 대학교수의 꿈을 간직하고 일본에 갔지만, 도자 액세서리의 사업성을 보고는 '바람' 피울 생각을 했다. 일본은 도자기 문화가 꽤 발달돼 있어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도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보면 그릇이 다 도자기더라고요. 플라스틱 그릇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도자로 만든 액세서리는 없었다. 일본의 유명한 백화점을 다 다녀봤지만 찾지 못했다. 여러 가지를 혼합해서 새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은 일본에서 배운 것. 처음에는 재미로 몇 개 만들었다. 당시는 일본과 한국을 왔다갔다 할 때였다. 한국에서도 좀 만들어 팔기도 하고, 일본에도 가져갔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일본에서 판매할 때는 프리마켓을 이용했다. 관광지에서 지인들과 함께 돗자리를 깔아 놓고 팔았다. 일본 사람들은 주말이면 관광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도심으로 많이 올라오는데 그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구매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일일이 다 만들어서 일본으로 가져갔어요. 일본에서는 공방 이용료가 너무 비싸서 제작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는 와중에 지진이 발생하면서 한국으로 아예 돌아오게 됐다.
"조금만 더하면 되겠네···되겠네···했는데 그러다가 예상치도 못한 지진으로 타격이 너무 컸어요. 아예 작정하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마를 가져가려고 했거든요.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제작 환경을 갖추려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던 도중에 지진이 발생한 거죠." 일본인도 많이 샀지만 일본으로 관광 온 한국 손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원전사태로 한국인들의 발길까지 딱 끊어진 것.
"일본은 지역마다 취향과 스타일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지역색에서 큰 차이가 없는 한국과는 다른 점이죠. 지진으로 지역 경기가 죽으면서 지역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던 제 상품이 어려워진 거죠. 거기에 한국인들의 발길까지 끊어지니 이중으로 연타를 맞은 셈이죠(웃음)."일본에서 느낀 도자 문화는 어떤지 물어봤다. 그는 일본에는 각 분야별로 장인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도자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장인들이 도자기 산업을 섬세하게 발전시킨 결과, 도자의 쓰임이 일상에서 상당히 폭넓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작은 분식집도 다 도자기를 쓰더라고요. 일부 반찬통이나 그런 것을 빼면 다 도자기였어요. 우리는 깨지지 않는 편리성을 위해 플라스틱을 쓰는데 그들은 깨져야 또 사게 되고 그래야 도자기 산업이 계속 발전한다는 인식이 있다고 해요."한반도에서 건너간 도자 기술이 현대 일본에서 활짝 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것이 많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말 아이디어로 꾸며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거기서 발상의 전환을 배웠다.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남보다 빨리 만들어야 해요. 모방이 많으니까." 다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일본인 특유의 엄격한 공사 구분은 적응하기 힘들었다."일본에서 배운 건 많지만 너무 쩨쩨하다고 느낀 것이 많긴 해요(웃음)." 학기말 과제로 전시회를 해야 되는데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전시하고 싶었다. 학생이라 돈도 없어서 선생님의 작업실을 잠시만 빌리려고 했던 것. 뜻밖에도 선생님은 그것도 수업의 일종이라며 수업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일 년 동안 배웠는데…. 거기서 돈을 내라고 하는데 상처가 컸어요(웃음). 그런 일들은 좀 힘들었어요.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러나 일본 선생님들은 이것저것 너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도움을 많이 받은 부분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한국과 다른 생활 관습으로 애를 먹은 그에게 일본인들의 친절함이 없었으면 무척 고달팠을 터.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든 예약을 반드시 해야 하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했다.
일본말이 능숙하지 않았을 때라 일일이 예약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게 너무 어려웠다. 처음에 도자 액세서리 시장 조사를 하고 조언을 들으려면 관련 분야의 사람을 만나야 했다. 언어의 장벽도 있고 더욱이 새로운 분야다보니까 누구에게 물어보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는 깜깜했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어요. 제가 좀 늦은 나이인 27세에 유학을 갔어요. 학교 친구들은 거의 20대 초반이었어요. 그들은 대부분 학생 마인드라 실무적인 사업에 관심을 갖는 제게 도움을 줄 만한 게 없었던 거죠. 그래서 혼자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나마 친절한 일본 선생님들 도움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죠." 일본인의 친절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본인들은 정말 한 번 친절함을 발휘하면 엄청나게 충실히 가르쳐 주더라고요." 시간강사로 있었던 한 일본 선생님하고는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공예 테마파크를 만들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자 액세서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더니 요새는 조금씩 눈에 띄고 있다고 한다. 액세서리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 경쟁이 치열한 곳. 다만 금으로 도색한다는 개념은 아직 없다. 금도금 액세서리는 제작 과정이 다소 복잡하다. 가마에 세 번 들어간다. 나오면 금을 발라서 굽고 이렇게 세 번 들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성의가 많이 들어간 '작품'이란다. 하지만 핸드메이드 제품이니 만큼 손님이 원하는 대로 주문해서 만들어주기도 한다.
아이디어는 주로 책을 통해서 얻는다. 도자기 관련 책을 보는 게 아니라 건축 등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종 분야의 책들을 본다.
"책을 보며 이걸 접목시키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같은 분야의 책을 보는 것보다 더 자극이 되거든요. 또 흙은 가소성이 있어서 만들다 보면 우연하게 여러 모양이 나와요. 그럼 너무 예뻐서 그대로 산출해 내기도 해요."그는 우리나라 액세서리 시장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현장 감각으로 단련된 그이기에 막연한 기대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액세서리 시장이 현재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컵도 판매를 하고 있는데 컵과 액세서리가 두 개가 놓여 있으면 컵은 조금만 비싸도 안 사지만 액세서리는 좀 비싸도 서슴없이 구매를 해요. 확실히 여자들은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웃음)."그는 시장 조사를 하러 남대문 부자재 시장을 수시로 다닌다고 한다. 부자재 시장을 보면 그해의 트렌드를 미리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벨트 아이템이 유행이 될 것 같아요. 트렌드가 거기에 다 모여 있거든요. 그래서 벨트에 도자기 액세서리를 접목시키려고 해요."그는 뻗어나가고 싶은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려니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솔직히 외로워요(웃음). 여자 혼자서 하기에는 사실 한계가 있더라고요. 나중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은 많아요. 주위에 독신 여성 사업가가 있는데 보니까 너무 힘들어해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어서 하고 싶어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장점도 이 일을 선택한 이유의 하나거든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면서 나중에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그의 꿈은 공예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다. 도예, 디자인, 건축 등의 다종다양한 분야를 한 자리에서 체험도 하고 전시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복합 테마파크다.
"소위 여성의 왕국을 구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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