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7집 '아, 대한민국' 표지
Universal
2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그 장면 그대로 생생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는 첫 번째 기억은 한 곡의 노래를 듣던 장면이다. 곰을 닮아 곰탱이라 불리던 선배의 곰 같은 손에 들려있던 작은 카세트.
재생 버튼이 눌려지기 전까지 우리는 스피커를 통해 전해질 노래의 내용을 짐작조차 못하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책상 한가운데 놓여진 카세트의 버튼을 누른다. 정태춘 선생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들의 죽음>. 노래가 흐르는 동안 편집실 안은 침묵에서 한숨으로 그리고 눈물로 바뀌었다(
노래 듣기).
정태춘 7집. '아, 대한민국'에 수록된 <우리들의 죽음>. 1990년도에 발매됐으나 불법음반으로 낙인 찍혀 정식 발매되지 못하다가,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합법적인 앨범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그 노래를 듣던 1994년도에 그 앨범은 불법음반이었던 셈이다.
복제된 불법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에는 맞벌이 부부가 문을 잠그고 일 나간 사이 집안에서 성냥을 가지고 놀던 남매가 불이 나서 질식사로 죽은 실화가 담겨 있다. 그날, 노래에 충격을 받고 눈물 흘리던 일곱 명의 대학 새내기들은 저마다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들의 죽음'을 각인시켰으리라. 요즘도 간혹 그 노래를 듣게 되면 간주 부분부터 울음을 참아야 한다.
신구 갈등도 있었지만, 잊지 못할 순간들두 번째 기억으로는 일 년에 한 번 만들어 내던 교지를 제작하고자 보름간 합숙하던 시간들이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실무적 경험도 거의 없고, 편집이나 글쓰기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말 그대로 유에서 무를 창조하던 그 시절. 몇몇 골수 선배들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세대 신입생들의 의견 충돌.
지금 생각해보면, 인터뷰라는 것을 생전 처음 해보는 신입생들에 의해 작성된 인터뷰 질문들은 오금이 저리고, 편집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짜깁기 문서들은 낯간지럽다. 그런 생짜 아마추어들에게 저널리즘을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에 꽃 피우기였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밤새 토론하고 교정하여 얻어낸 예술 작품이요, 나아가 퓰리처상 부럽지 않은 땀의 열매였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곤 했었다. 볶은 김치에 콩나물국으로 끼니를 이어가도 함께 뒹굴며 쓰고, 수정하고, 편집하던 그 순간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마지막 회상 장면은 소위 편집실이라 불리던 동아리방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다. 4층 건물 꼭대기 후미진 구석방이었지만, 햇볕만큼은 왕의 정원 못지 않던 곳. 칙칙한 강의실과 따분한 강의에 대해 자체 휴강으로 맞불을 놓고 나서, 행여나 다른 교수님들 눈에 보일까봐 쥐새끼처럼 몰래 스며들던 그곳. 그곳에서 우리들은 불온서적(?)을 눈동냥 하고, 전공 서적과 소설책을 맞바꾸고, 방명록에 낙서 따위 끼적이며 하루를 보냈다.
오래된 철제 책장은 중간부위가 찌그러져 학원 탄압의 증거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듯했고, 주워온 지 10년은 돼 보이는 소파는 희한하게 등만 기대면 잠이 쏟아졌다. 그러다가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 선배라도 들이닥치면, 자리를 박차고 낮술의 방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가는 술잔은 여전히 돈독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