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분위기가 어울렸던 옛 공간이 화려한 은행나무잎 덕분에 무척 새롭게 다가온다.
김종성
성균관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 수위실 우측의 주차장으로 걷다보면 큰 한옥 건물들이 나온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는 명륜당이라는 곳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탁 트인 마당과 한옥 공간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명륜당은 조선시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공부방이며 공자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대성전 사당이 바로 옆에 있다.
천 원 지폐를 보면 퇴계 이황 선생의 인물 그림 뒤로 명륜당(明倫堂) 글자가 보이는 한옥 건물이 이곳이다. 건축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정신사적 상징성이 강한 건물이라 한 나라의 지폐에 실렸나보다.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최고의 국가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중심 건물이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는 넉넉하고, 모든 것은 소탈하여 최소한의 꾸밈뿐이다. 적은 것이 아름답고, 비움으로써 꽉 찬다는 현대의 세련된 미니멀리즘(최소주의), 우리 조상들은 이미 예전에 한옥 공간에서 구현하였다.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이었던 성균관은 조선의 국립대학이었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이곳에서 당대의 수재들이 숙식을 해가며 유학을 공부했다. 그들은 유생(儒生)이라 불렸다. 문과 응시에 많은 편의를 제공 받기도 했던 유생들은 강도 높은 수업을 받으며 엄격하게 생활했다.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고르게 한다'는 '성균(成均)'의 의미를 실천하듯 유생들은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거나 수업을 거부하는 '권당(捲堂)'을 하며 나라의 부당한 처사나 바르지 못한 정치에 대해 자신들의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성균관은 크게 두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앞부분은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뒷부분은 공부를 가르치던 공간이다. 이를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 한다. 이 두 공간을 옛 부터 지켜보며 역사의 증인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수백 년 묵은 고목 은행나무로 제 59호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명륜당을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성전환을 한 전설속의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