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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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경쟁자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허버트 험프리는 존슨 행정부의 부통령 출신으로 갈가리 찢긴 민주당을 봉합하려 노력을 했습니다. 자신이 집권하면 '베트남 전쟁'을 당장 종식시키겠다며 닉슨과 토론을 요구했지만 이 노련한 닉슨은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토론을 거부했지요. 왜냐? 토론 해봤자 득 되는 것이 없었거든요. 닉슨이 말을 잘 못해서라기보다는 전략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민주당에서 '소심한 리처드'라고 비아냥거리든 말든 닉슨은 그냥 무시하고 라디오 야간방송에 열 차례나 출연해서 교육과 복지, 무기와 평화 등 주요 이슈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고 '학자 같은' 태도로 임했다고 합니다. 어떤 콘셉트로요? 바로 '단합하자'라는 콘셉트죠.
'뉴 닉슨'의 이미지가 힘을 발휘해서 미국 국민들은 닉슨을 예전의 '분열적 노림수'나 찾는 정치인이 아닌, 미국을 통합시키고 깊은 상처를 치유할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우려해서 험프리의 런닝메이트인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Muskie)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닉슨씨,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진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가? 당신은 평생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저항하며 싸움을 벌였다. 당신은 민주당을 반역자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 그는 해리 트루먼과 싸웠다. 그는 루즈벨트와도 싸웠다. 케네디와 스티븐슨과도 싸웠고 린드 존슨과도 싸웠다. … 이 공화당원은 자신이 노동자의 친구라고 떠벌리고 있다. 이만하면 뉴스감이다. 그러나 내가 보장하건대, 그가 노동자의 친구라면 스크루지는 바로 산타클로스다."머스키로서는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이겠습니까? 빤히 보이는 응큼한 닉슨의 전략에 미국 국민들이 깜박 속아 넘어가는 상황에 대해서 속이 상하지 않을 민주당 정치인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주당은 여기에 속수무책 당하면서 스스로 분열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무능했던 것이죠. 어쩐지 이 상황…. 2012년 대한민국의 야당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주당은 커다란 악재를 만났습니다. 표를 분산시킬 강력한 무소속 후보가 나타났던 것이죠. 조지 윌리스 앨라바마 주지사입니다. 그는 1963년 9월 10일, '인종분리는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결'에 따라 백인학교에 입학하게 된 흑인 학생 20명을 경찰력을 동원해서 막으려 했습니다. 아주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져버린 조지 윌리스는 '미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파워게임의 법칙>의 저자 모리스는 책에서 '무소속'후보라고 주장했지만 착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민주당 험프리의 표를 갉아먹었습니다. 그의 주적은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 정부였거든요. 또 유권자들은 지리멸렬하고 따분하고 일관성 없는 민주당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많은 수가 윌리스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험프리는 윌리스를 주저 앉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 표만 빼앗겼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왔습니다. 닉슨 43.3%, 험프리 42.6%, 윌리스 13.5%의 근소한 차이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모호한 화법과 '단합'을 내세운 치밀한 전략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한 것입니다. 솔직히 닉슨은 베트남 폭격과 확전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속셈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그저 '단결하자! 단합하자!'만 외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외치면 외칠수록 민주당은 분열했고 지리멸렬해 간 것이죠. 여기서 어김없이 딕 모리스는 그의 사감(私感)을 드러냅니다.
"그(닉슨)가 대통령으로서 무서운 집착과 편집광적 태도를 드러냈고 또 피아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대응을 보이다가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된 정황을 생각한다면 단합을 내세운 1968년의 닉슨 선거운동은 상당히 엉큼하고 음흉해 보인다. …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낸 형태는 정치의 어두운 면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즉 분열시켜 정복하는 게임에서 조작과 기만행위가 가끔씩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대한민국의 데자뷰 혹은 진화, '유체이탈 화법'카를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에 나오는 용어로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에서 유래된 말인데, 쉽게 말해 왕의 가면을 쓰면 왕의 역할을, 동물의 가면을 쓰면 동물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이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살다보면 집단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여러 역할을 배우가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듯이 산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일들은 남의 이야기 하듯 하지 않고 분명히 자신의 일로 밝히겠지만 정작 문제는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꼭 남의 일처럼 이야기 한다는 것이죠. 사람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이런 것이 꼭 병적인 일이거나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융은 덧붙입니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것은 '책임'의 문제가 뒤따르는 정치인 또는 공인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 또는 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해놓고도 그건 자기가 한 행동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심지어 남 탓까지 합니다) 자기가 결정한 게 아니라고 정말 스스로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인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권력의지가 강한 정치인일수록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