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여러분들의 수능대박을 응원합니다!마을 한 고등학교 앞에 응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변창기
7일 아침,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습니다. 수능시험 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등교를 1시간 늦춰 한다는 건 몰랐습니다. 학교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저는 평소 출근시간대로 출근했습니다. 제가 사는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 쪽 아랫길과 동구청 쪽 윗길로 나뉘어 있고 양 쪽으로 버스가 다닙니다. 저는 동구청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제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내릴 수 있습니다.
버스 타고 동구청에 다다를 무렵이었습니다. 동구청 맞은편에 고등학교가 있는데 학생들과 교사, 경찰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두어 정거장 더 가야 하지만 저는 거기서 잠시 내렸습니다. 학생들이 교문 앞에 서서 응원을 하는 모습도 보였고요. 등 뒤에 '자유총연맹'이라는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은 나이 든 여자들이 미처 밥을 먹지 못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려는지 김밥 한 줄과 우유 하나씩을 들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어느 학생은 경찰 오토바이 뒤에 타고 와, 늦었는지 학교 안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수능시험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시험인지 저는 모르지만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한 걸 보니 큰 행사이긴 한가 봅니다. 저는 그런 풍경이 낯섭니다. 저는 대학 입학시험을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펼침막까지 붙여가며 난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수능 날 아침 풍경을 잠시 지켜보면서 제가 고입시험을 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집안 형편도 안 되었고 실력도 모자랐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담임 선생님이 시험이나 쳐보라 했습니다. 어머니도 시험 쳐보고 붙으면 어떻게 해서든 입학금 마련할 테니 한번 해보라 했습니다. 그래서 중3 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체력시험을 먼저 보았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운동을 시키고 점수를 매겼습니다. 모두 만점 맞으면 20점을 쳐주었습니다.
저는 동구에 있는 공업계 고등학교에 응시원서를 냈습니다. 대학 갈 형편이 못 되니 기술이나 배워 공장에 취직하라는 것이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가정 형편 또한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나름 시험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책만 보면 항상 정신이 산만해졌습니다. 아버지의 술주정도 힘들었습니다. 산 속에 집이 있어서 전기도 없이 호롱불로 붉을 밝혀 책을 보자니 글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문계는 점수가 120점은 넘어야 합격했으나 실업계는 체력시험 20점에 고입시험 90점 합해서 110점 이상 되면 합격했습니다. 체력시험은 교사들이 많이 봐주어 조금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20점을 주었습니다. 저도 체력시험은 20점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입시험을 보고 나서 기다려도 저에게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습니다. 반 친구들은 모두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느니, 어느 실업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느니 하면서 자랑할 때 저는 쥐 죽은 듯이 고개 숙여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면서 저는 제 나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했습니다. 당시 대기업엔 '사환'이라는 일자리가 있었습니다. '사원'들의 잡심부름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벌써 나이가 오십줄에 가까웠네요. 저는 그렇게 옛 일을 생각하며 수능시험장 앞을 잠시 지켜보다 출근했습니다.
용돈 아껴서 아빠 점심 사준 딸... 수능 덕분에 '점심대박'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