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신당역.
김종성
"요동을 정벌하라!" 고려 우왕과 최영의 명령을 받고 5만 대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군대를 되돌려 수도 개경으로 진격했다.
이성계의 쿠데타는 인간 세상에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 이 쿠데타가 '신들의 세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성계의 쿠데타와 왕조 창업은 민간신앙에 영향을 미쳤고, 서울 신당동을 무녀촌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신당동' 하면 떡볶이 타운을 떠올리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신당동' 하면 무녀촌을 떠올렸다.
만약 이성계가 쿠데타와 왕조 창업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면,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신당동의 무녀촌 이미지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많은 땅 중에서 하필이면 신당동이 무녀촌이 된 것은 바로 이성계 때문이었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 원래는 무녀촌 이었다오늘날 '신당동'에 해당하는 한자는 새로운 신(新)자와 집 당(堂)자와 마을 동(洞)자로 구성된 '新堂洞'이다. 말 그대로 하면 '새로 세워진 집들이 있는 동네'란 뜻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도시 개념이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동학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한 강제적 사회 개편) 이전까지만 해도 신당동에 해당하는 한자는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神堂洞'이었다. 무녀들의 신당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오늘날 서울에서는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운구차가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정된 성문을 통해서만 시신이 한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한양에서 그런 성문으로 지정된 곳은 광희문(서소문)과 소의문(남소문)이었다. 이 중에서도 광희문이 이런 기능의 중심이었다. 광희문은 '시체를 내가는 문'이라는 뜻인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을 정도다.
시구문이 되다 보니, 광희문은 산 사람과 더불어 죽은 사람이 통과하는 문이 되었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교차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을 무녀촌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神堂'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남산 기슭의 약수골에서 시작해서 신당동을 지나 청계천에 합류하는 개천이 과거에는 무당 개울 혹은 무당천으로 불리고 무당 개울 곳곳에 놓인 다리가 무당 다리 혹은 무당교로 불렸던 것도 신당동에 무녀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이전만 해도 신당동에는 묘지가 많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화장터가 있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신당동 근처인 왕십리에 액막이굿(재앙 방지 굿)을 하는 아기씨당이란 신당이 많았던 것도 신당동의 주술적 기능이 주변 지역으로 파급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