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곽동운
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