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통합진보당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서. 이날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서와 함께 정당활동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번 정당해산심판 청구는 1988년 헌법재판소가 창설된 이후 첫 사례다.
연합뉴스
통합진보당 강령 전문에는 "통합진보당은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민중이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강령 해설집에는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을 당의 기둥으로 삼는다. 소수 특권 세력은 통합진보당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바로 이점에서 다른 정당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는 정치경제적 특권 세력들이 정권에서 완전히 물러나고"(강조는 법무부)라는 표현이 있다.
법무부의 친절한 해설이 없다면 이것이 어떻게 정당해산청구 사유가 되는지 알아채기 쉽지 않다. 법무부는 이 내용이 "민중주권 주장은 노동자, 농민, 근로 인테리에게 주권이 있고, 민중이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는 북한의 인민주권과 동일"하다고 '분석'한다. 또한, 법무부는 통합진보당이 "일하는 사람인 민중만 주권을 가지는 사회를 추구하므로,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라고도 해석했다.
정치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웬만큼 국어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논리전개가 점프를 넘어 공중부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어렵지 않다. 그렇더라도, 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의 헌법학적 차이에 대에서는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이다.
헌법학에서 국민주권원리는 '투표하는 유권자와 당선되는 대표자 간의 위임관계는 자유 관계'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즉, 당선된 대표자는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기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위임관계에 있으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국가 전체의 대표로써 활동한다. 반면, 인민주권의 원리는 대표자는 자신을 뽑은 유권자와 명령위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유권자의 의사를 벗어나면 유권자로부터 통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헌법은 46조 2항에서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라고 규정하여 자유위임 원칙에 기초한 국민주권론을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에게는 투표를 제안할 권리도, 국회의원을 소환할 권리도, 입법과정에 개입할 권리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국민주권론의 한계다.
그러나 우리 지방자치제도는 지역 주민에게 조례를 제정하거나 개정할 권리, 지방의원이나 단체장을 소환할 권리, 주민투표를 제안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방자치 제도가 국민주권론적 원리가 아니라 인민주권론적 원리에 따라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핵심은 국민주권은 자유민주주의이고, 인민주권은 북한 사회주의라고 단순히 치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정치공동체의 주권행사 원리를 어떻게 규정할 지에 대해 선택가능한 문제다.
게다가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공동체에서도 정당의 역할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을 '편파적으로' 대변하는 데 있다. 국민주권론은 다양한 갈등이 정당으로 대표되고, 의회 내에서 이런 다양한 갈등들이 서로 충돌하고 논쟁하고 타협하도록 보장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을 당의 기둥"으로 삼거나, "소수 특권 세력은 통합진보당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뭐가 문제기에 법무부가 굵은 글씨로 처리해 가며 위헌정당을 들먹이는가?
"정치경제적 특권 세력들이 정권에서 완전히 물러나고"라는 표현도 그렇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특권이란 "어떤 신분이나 지위,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별한 권리나 이익"을 말한다. 그렇다면 법무부는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정권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국회에서 한창 기이한 논리로 진행되고 있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역시 북한 추종이라 주장할 텐가?
저급한 법무부의 해석 수준 이런 식으로 강령을 분석하는 저급한 수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통합진보당 강령 해설집에 있는 "소수 특권 계급의 정치경제적 특권들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싸워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수호한다"라는 구절도 "민중이 소수의 특권계급과 비타협적으로 싸워 정치적 특권뿐만 아니라 경제적 특권까지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결국 북한식 '사회주의적 형태의 경제질서' 도입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쯤 되면 법무부가 북한헌법을 찬양하는 이적행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없앤다는 것이 북한 사회주의적 형태의 경제질서라고? 법무부에서는 실제로 북한에서 '정치적·경제적 특권'이 없다고 믿는다는 것인지,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없애면 안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런 내용을 북한헌법의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북한헌법 20조),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철도·항공운수·체신기관과 중요 공장·항만·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북한헌법 21)는 내용과 연결시키니, 그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평화체제 조기 구축", "주한미군 철수", "종속적 한미 동맹체제 해체"라는 강령 내용이 종북이라는 논리는 고리타분한 레퍼토리니 일단 넘어가자. 다만, 이런 주장을 토론의 대상으로조차 삼지 못하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임한다면 바로 그게 코미디다.
법무부는 "대표적 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반민주 제도와 악법을 폐지하고, 국정원, 기무사 등 특수권력기관의 시민생활 침해, 사찰행위를 전면 금지하며, 민주적 통제를 강화"한다는 강령 구절에도 딴지를 건다.
이 구절의 분석 결과,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우리사회 체제를 변혁하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법무부가 국가보안법을 우리(?) "체제 유지를 위한 제도와 법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가보안법 뒤에 붙인 '등'이다. 법무부는 각종 반민주 제도와 악법의 폐지, 국정원, 기무사 등 특수권력기관의 시민생활 침해, 사찰행위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체제 부정"으로 적시한다.
이쯤 되면 정부가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등이 총동원된 여론조작, 사찰행위, 시민생활 침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런 위법 행위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라는 강령을 "우리사회 체제 내의 개혁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것으로 체제 유지 수단인 제도와 법을 전면 폐지"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런 인식이라면 그들이 그렇게 유지하려고 하는 '체제'가 과연 누구의 체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을 제외한 세력의 체제?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소유한 소수세력만의 체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체제라면, 이것을 바로 잡자는 주장이 북의 "대남혁명의 일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민주주의 최저선이 붕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