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비참한 백수인 내게 그녀가 나타났어

[소설-엘라에게 쓰는 편지] 8편

등록 2013.11.02 15:15수정 2013.11.0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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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엘라


오랜만이지?
이제 좀 살 만 해졌다고 편지 안 쓰고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주길. 그런데 좀 나아진 건 맞아. 요즘에 나 조금은 행복해진 것 같아. 왜냐면 혼자가 아니거든. 내가 왜 너한테 밴쿠버에서 이야기했던 친구 기억나?

정말 친한 친구인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어져서 볼 수가 없다고. 그 친구가 내 인생에서 너를 빼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물론 둘 다 나한테는 소중하지. 그런데 이 친구랑은 함께한 시간이 정말 길거든. 10년도 더 됐지 아마? 암튼 그게 언제였더라.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몇 주 전이었어.

카페에 가서 그 날도 노트북을 꺼내서 일자리 확인하고 자소서를 쓰고 있는데 창가 저 쪽에 앉은 사람 얼굴이 너무 낯익은 거야. 그래서 내 눈을 순간 의심했지. 벌써 몇 년째 소식이 끊겨버린 그 친구였어. 근데 다가가서 인사할 용기가 없었지. 그래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른 한 쪽 구석에서 계속 컴퓨터를 하다가 몇 시간 뒤에 가보니 벌써 자리를 뜨고 없더라.

그리고 며칠이 지났어. 내가 너한테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 카페를 일주일에 세 네 번은 가거든. 근데 그 날 다시 그 아이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그래서 가서 등을 두드렸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더라. 날 기억하더라고. 하긴 기억 못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 날 우리는 긴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집에 가려는데 나한테 그러더라.

"영화 볼래?"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어. 왜냐면 참 걔다운 질문이었거든. 그리고 그건 나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도 되고.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늘 함께 영화를 보러 다녔거든. 그 날 우리는 영화를 보고 돈가스를 먹었어. 그리고 또 웃었지. 왜냐면 수능시험 끝난 날 우리는 영화를 보고 돈가스를 먹었거든. 벌써 7~8년은 더 된 일인데 갑자기 너무 그리워졌어.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약속한 것 마냥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자소서를 쓰고 각자 할 일을 했지.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며칠 뒤에는 다른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노래를 들었어. 팝송이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세상 모든 것이 변해서 나도 더 이상 같은 걸 느낄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지. 그때 창밖의 햇살이랑 공기랑 그 순간의 따사로움이랑 음악이랑 너무 완벽해서 잊을 수가 없어.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백수라는 것도 아직도 이력서를 쓰고 수많은 면접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것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정말 마법 같은 시간이었어. 넌 알잖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비참했는지. 이런 날도 있구나 싶어서 눈가가 시큰해졌다니까. 다만 이 뒤에 내가 감당 못 할 정도의 나쁜 일만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했지.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아. 메마르고 거친 느낌이 아니라 조금은 보송보송한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할까? 예전에는 나를 보호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뭔가 얇은 막이 나를 둘러싼 것 같아. 네가 없어서 하늘에서 이 친구를 보낸 건가봐. 나도 이제 좀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좀 나아질 것 같아. 그래서 너한테 편지를 좀 늦게 썼지만 이해해줘. 다 좋은 소식이지? 다음번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 너한테도 다시 들려줄게. 보고 싶다. 엘라 잘 있어.
#취업 #면접 #백수 #자소서 #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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