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된 유해는 흙을 털어낸 후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것만 따로 모아 아세톤을 발라 건조시킨다.
모소영
"무섭지 않아?"
함께 유해를 수습하던 한 어르신이 물었다. 목장갑을 낀 손으로 호미질을 하다가 부서진 턱뼈 조각을 들어올리던 순간이었다. 턱뼈에 살짝 걸쳐 있던 치아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태어나 처음 접하는 사람의 뼈…. 난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충남 공주 왕촌 살구쟁이. 살구나무가 많아 봄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살구쟁이'라 불리던 곳이란다. 하지만 1950년 7월 어느 날, 이곳에서 4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총살됐다.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일부 수감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것은 '인민군이 남하할 경우 동조할 수 있다'는 막연한 추정이 전부였다. 이후 이곳은 죽일 살(殺), 원수 구(仇)를 쓴 '살구쟁이'로 그 뜻이 바뀌었다.
썩은 나뭇가지 같은 유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지난 2009년 1차 발굴로 4개의 구덩이에서 317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발굴단은 80여구의 유해가 추가로 매장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현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정부가 추가발굴 예산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지난 달 14일 충남도의 예산지원으로 남아 있던 유해 발굴작업이 뒤늦게 시작됐다.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를 하던 지난 달 15일, 유해발굴을 시작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애잔한 마음에 내 발로 현장을 찾아갔다. 처음 찾은 살구쟁이 골짜기에선 음습함이 몸서리치게 몰려왔다. 가을볕이 따가운 한낮인데도 햇볕 한 줌 허락하지 않았다. 유해발굴을 책임진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에게 유해발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박 교수는 다행히 흔쾌히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