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조용한 분위기의 동묘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김종성
동묘는 약소국가인 속국(屬國)의 비애가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동묘가 있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관우 장군의 묘가 생긴 데는 사연이 있었다. 관우의 첫 번째 사당인 남관왕묘는 선조 31년(1598)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이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에다 거처를 정하고 요양을 하면서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것으로 관왕묘의 기원이 되었다. 이것이 남관왕묘(南關王廟)이며, 줄여서 '남묘(南廟)'라고 불렀다. 남묘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관성묘 유지재단에 의해 1956년에 재건되었다. 그 후 서울역전 도동지구 재개발로, 현 위치인 사당동 180-1번지에 옮겨 복원하였다.
두 번째 사당인 동관왕묘는 1596년 명나라 신종황제가 건립을 요구하는 조서와 함께 보내온 관왕묘 건립기금 4천금으로 1602년 봄에 준공한 것이다. 이 무렵 경북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서도 관왕묘를 세웠는데 모두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물론 동원 인력은 고스란히 조선 조정, 정확히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백성들이 떠맡았다. 동묘를 짓기 시작한 것이 1600년 임진왜란 직후의 겨울,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난 후라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군대가 약소국에 주둔할 때 피해자는 약소국 백성이다.
저 왜국 평정하여 靖卉桑우리 동쪽 되찾아주셨기에 重奠吾東이제 우리가 평안해졌으니 維藩小康그 높은 훈공 어찌 잊으리 勛敢忘- 허균, <관우송시(關羽頌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