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북한 평양에서 만난 허철남씨.
박상규
벌써 8년 전 일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2005년 <오마이뉴스>는 평양에서 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나는 취재기자 자격으로 평양에 갔다. 평양 행사 일정에는 관광도 있었다. 김일성 생가에 갔을 때 일이다. 남한에서 간 일행들과 우르르 이동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끌었다.
"동무 이리 오라요! 남한 동무들 이동하는데, 왜 자꾸 여길 끼고 그라요! 빨리 저리 비키라요!" 키가 큰 북한 정보원이 나는 질질 끌고 갔다. 요약하면, 그 정보원은 나를 북한 주민으로 알았던 거다. 북한 주민의 외모와 스타일을 폄훼할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봤을 때 북한 인민과 내 스타일은 많이 다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정보원이 바로 허철남이다. 이 일을 계기로 '허철날 동무'와 친해졌다. 그날 밤, 맥주 한잔 하는데, 그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박 동무 아직 결혼 안 했지요? 내레, 그럴 줄 알았습네다! 내레 그동안 남한 동무들 많이 봤지만 고조, 박 동무가 최곱니다! 남남북녀란 말도 있고... 요즘 남한 남성 동무들 보면 죄다 잘 생기고 훤칠한데, 박 동무는 이건 뭐...(아래 위로 나를 훑어보며) 남한에서 장가나 갈 수 있겠습네까? 내레 맘이 아파서 안 되갔습네다! 날래 통일합시다. 참한 북한 여성 하나 소개해줄 테니, 날래 통일합시다!" 북한 정보원이 보기에 나의 외모는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고 평화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나보다. 하지만 '국격' 좋아하는 이명박 정부 때나 해외에서 외교보다는 패션 등 고운 자태에 더 신경쓰는 지금의 박근혜 정부 때 저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땠을까? 통일부와 국정원은 공동조사단을 꾸려 "적국에서 국격을 손상시키고 나라 망신시킨 종북세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듯하다.
역시 정부 당국이 알면 '종북' 운운하겠지만, 북한 정보원과 엄마는 한 가지 생각에서 제대로 통했다.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내 아들이지만... 저 얼굴로 어떻게 기자 일을 할까?' '저 남한 동무 기자라는데... 남한에는 외모 기준이 없나?' 어쨌든 기자 생활 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외모가 아니냐는 우려, 혹은 편견을 남북이 함께 갖고 있는 거다. 글쎄, '잘생긴 놈'이 이 바닥에서 어떤 특혜를 받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어서 알 길이 없거나, 특혜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분단의 경계를 넘어 남북이 함께 걱정하지만, 내가 외모 탓에 취재하면서 차별을 겪은 적은 없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적극 활용한 적은 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 일이다. 평택 제2함대 사령부에 장병 가족들이 모였다. 군 특성상 아무나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군측은 버스를 이용해 정문에서 장병 가족만 태워 안으로 들어갔다. 현장에 있던 나는 그 버스가 장병 가족만 태운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차에 올랐다.
장병 가족들이 모인 강당은 슬픔으로 가득찼다. 잠시 뒤 천안함에서 생존한 병사와 함장이 등장해 경위를 설명했다. 강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분노한 장병 가족들은 군측에 거칠게 항의했다. 돌발 상황이었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가 현장을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담았다. 이 일로 내가 장병 가족이 아닌 기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순간, 2005년 평양의 그때처럼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끌었다. 군 장교였다.
"장병 가족이세요?" "......"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 "신분증 없어요? 빨리 보여주세요! 장병 가족 맞는지 저희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동안 당황해 머뭇거리던 나. 잠시 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내 아들 때문에 마음 아파 죽겠는데, 왜 그래!" 헉, 동생 혹은 조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내 아들"을 찾았을까. 그때 36살이었는데, 군에 아들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는 장교의 눈을 바라보며 '이런, 내가 왜 이런 실수를...'하며 자책했다. 하지만 그 장교의 반응은 더욱 놀라왔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장교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취재를 시작해 '단독' 기사를 송고했다. 시간이 지난 뒤, 기자실에서 그 장교를 다시 만났다. 장교는 나를 보고 '아버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라는 식으로 엄청 당황했다. 나는 장교에게 다가가 "본의 아니게 신분을 속여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장교는 진심인지 아니면 복수하려는 것인지, 내게 말했다.
"진짜 아버님 아니세요? 정말 깜빡 속았습니다. 근데 나이가....?" 이거 참 큰일이다. 조국의 안보를 최전선에서 지키는 남한 장교나, 감각과 눈썰미가 좋아야 하는 북한 정보원이나, 이렇게 사람을 제대로 못 봐서 쓰겠나! 그나저나, 정말 나의 외모는 그들이 깜빡 속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건가?
엄마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