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녹색으로 칠한 부분은 전성기인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년) 때의 영토.
김종성
첫째, 현지화의 문제다. 중동의 역대 슈퍼 파워들은 어떤 형태로든 현지의 문화를 수용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터키공화국의 조상인 투르크족(튀르크족)이라 할 수 있다.
터키의 영토는 지금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축소됐지만, 과거에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중간에 몽골제국이 중동에서 패권을 행사한 기간을 제외하면,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거의 대부분 기간 동안에 이 지역의 패권을 행사한 민족은 투르크족이었다.
투르크족은 한국인들은 '돌궐'로 발음하고 중국인들은 '투쥐에'로 발음하는 유목민족이다. 이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에서 활약하다가 당나라(618~907년)와의 경쟁에서 밀려 중동과 동유럽으로 민족이동을 단행한 뒤 현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민족이다.
투르크족이 돌궐족의 후예라는 점은 오늘날의 터키가 서기 552년을 자신들이 나라를 세운 해로 기념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552년은 돌궐족이 몽골초원의 유목민족인 유연족의 지배에서 독립한 해다.
투르크족은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에서 활약한 민족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착지인 중동에서는 당연히 이방인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중동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 지역의 패권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그 비결은 무엇보다도 현지화 정책이었다.
투르크족의 현지화 정책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슬람교 개종이다. 이런 적응력이 있었기 때문에 투르크족 국가인 셀주크 투르크가 11세기부터 중동의 강자로 등극하고, 또 다른 투르크족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가 14세기부터 지역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투르크 국가가 보여준 현지화 정책은, 이 지역에 먼저 정착한 민족들이 투르크족의 지배에 대해 반감을 덜 갖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현지화라는 측면에서 현대의 미국은 원초적 한계를 갖고 있다. 중동에 영토를 두지 않고, 이 지역을 원격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현지화를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중동 사람들을 존중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미국은 이마저 무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편파적 태도로 중동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는 점만 봐도 미국이 이 지역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다양성 존중 없인 중동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둘째, 다양성 존중의 문제다. 중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는 지역이다. 또 이곳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와 상업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그래서 세계의 여타 지역에 비해 문화적 다양성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충돌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중동의 역대 패권국들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는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다. 투르크족은 물론이고 투르크족 이전의 패권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나라는 고대 페르시아 왕조인 아케메니드 페르시아(기원전 550~기원전 330년)다.
투르크족이 중동의 여타 민족들과 혈통이 다른 것처럼, 페르시아 역시 중동의 주류 민족들과 혈통이 달랐다. 페르시아와 그 후예인 이란은 이라크·시리아·사우디·쿠웨이트·레바논 등이 속한 아랍권과 혈통이 다르다. 아랍권은 셈족인 데 비해, 페르시아는 인도·유럽어족이다. 그래서 고대 페르시아는 아랍권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질감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아랍권 사람들은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서기 7세기를 문명의 출발점으로 인식하지만, 이란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기는 하지만 그런 인식을 거부한다. 이란인들은 서기 7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페르시아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케메니드 페르시아 제국이 인도·유럽어족으로서 아랍의 이민족들을 통치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양성 존중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키루스 2세의 정책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키루스 2세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레스 대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성경에서는 그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를 존중해준 사실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