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귀환>(오마이북) 책 표지
오마이북
오마이북에서 새로 출간한 <마을의 귀환>은 현재 이 시대, 먹고 살기 힘든 이들에게 힐링이 되는 책이다. 그간의 기사들을 모아 정리한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위로를 얻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사례집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저력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례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모습 때문이다. 같은 고민과 같은 걱정들을 하는 사람들. 왜 우리는 그 고민들을 함께 나누지 못할까? 아무리 큰 걱정이라도 나누면 반이 되는 법인데.
따라서 책을 읽는 내내 공동체와 관련된 개인적인 기억들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장면1 새로운 동네의 오래된 이웃사촌두 달 전 이사 온 강동구는 내가 결혼 후 4년 동안 살아온 구로구로부터 매우 먼 곳이었다. 강동구는 가히 서울의 동쪽 끝이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30년 넘게 살아온 곳이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심적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감보다 더 했다. 예전에는 인천이 차로 30분이면 가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춘천이 딱 그 꼴이라니. 이 낯설음이란.
이런 나와 달리 아내는 강동구에 대해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서 서울은 어차피 어느 곳에 살거나 모두 타지인 바, 내가 느끼는 낯섦과 불편함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시댁이 승용차로 8분 거리에서 40~50분 거리로 멀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내가 무엇보다 강동구를 덜 낯설어 하는 이유는 이웃 때문이었다. 이곳 강동구에는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했던 동네 친구가 3년 전에 이사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부부와 연락하는 시간이 부쩍 잦아지면서 아내는 적응이 빨라졌다. 저녁 먹고 할 일 없이 산책이나 같이 하자고 불러낼 수 있는 편한 이웃의 존재가 그녀의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내가 직장을 옮겨 새로 하는 일이 지역 사람들을 만나는 일 아니던가. 그러니 자연스럽게 구로구에서보다는 더 많은 이웃들을 알게 되고, 그 중 자연스럽게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이들을 찾을 기회도 높아질 수밖에.
아내에 따르면 이는 구로구에서의 삶과 비교하여 매우 큰 변화였다. 구로구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나가 놀이터에 앉아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웃들을 사귈 수 있었지만 쉽게 속을 터놓을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입방아에 오르내릴까봐 조심했어야 했다고 한다. 물론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비슷한 이웃을 찾아 나서면 되겠으나 아이 셋 기르는 엄마로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 장면2 처갓집에서1년 전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처갓집에 들르니 장인어른은 기르던 오리를 잡아먹자며 나를 불러내셨다. 당신의 몸이 불편하시니 사위더러 살아있는 오리를 직접 잡으라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촌놈이 어찌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사위로서 차마 못한다고 할 수 없었던 터라 우선 장인어른을 따라 나섰다. 뭔 수가 있으려니.
우리 앞에서 한창을 고민하시다가 그 중 가장 실한 오리를 찜하시는 장인어른. 말씀대로 그 녀석을 우리에서 꺼낸 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대뜸 내게 이웃 마르코 아저씨께 돼지꼬리를 빌려오라 하셨다. 돼지꼬리? 그게 뭐지?
장인어른이 너무 당연하게 말씀하신 터라 차마 다시 여쭙지 못하고 마르코 아저씨 댁에 가서 이웃 어르신께 들은 대로 쭈뼛쭈뼛 돼지꼬리를 읊었다. 다행히 마르코 아저씨는 내게 장인어른이 오리를 잡으시냐고 되물으셨고, 도와주시겠다며 그 의문의 돼지꼬리를 들고 처갓집으로 올라오셨다.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물을 끓일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온수기였다.
오리의 목을 꺾고 끓는 물에 담그고 난 뒤 털을 뽑고 있는데 문득 궁금했다. 처갓집에도 닭이며 오리, 소, 칠면조 등을 키우고 있는데 이 돼지꼬리 온수기는 없는 건가? 그럼 이웃 도움 없이 어떻게 오리며 닭을 잡는 거지? 동물을 잡을 때마다 마르코 아저씨께 부탁하는 건가?
그러나 장인어른은 이와 관련된 나의 질문을 오히려 어처구니없어 하셨다. 마르코 아저씨가 온수기를 가지고 있는데 뭣 하러 사느냐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닭이나 오리를 잡을 때마다 마르코 아저씨가 도와주고, 또 마을에서 뭔가를 할 때는 그것을 잘하는 집이 나서서 도와주고. 그러다 보면 굳이 각각의 집에서 1년에 몇 번 쓰지 않는 물건들을 굳이 갖춰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저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수밖에.
장인어른의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것이 소위 시골인심이요, 이웃의 정이며, 굳이 학술적으로 이야기하면 공동소유였다. 부러웠다. 그것은 분명 도시에서 사는 내가 감히 생각해보지 않는 삶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동네 누구누구에게 가서 빌리기도 했었는데, 지금 나의 삶 속에서 결여는 곧 소비로 이어지는구나. 그만큼 이웃이 없다는 뜻이겠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