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갈등을 풀어 준 가스레인지장서갈등은 작은 사건으로 쉽게 풀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장모와 사위는 가족관계이기 때문이다.
이혁제
가스레인지야 고맙다장모는 온통 짜증이 나 있었다. 범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가스레인지였다. 아내가 작년에 바꿔준 가스레인지에 점화가 안 되었던 것이다. 장모님 말로는 오늘 하루 종일 가스 불이 안 켜져서 밥도 못 해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나 보고 고쳐보라는 것이다.
삼일 후면 추석인데 아들을 위한 하루를 허비하였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생각만 해도 알만 했다. 그러면서 유명회사도 아닌 싸구려 가스레인지를 사주어서 고장 나고 애프터서비스를 받으려고 전화를 100번을 해도 안 받는다고 죄 없는 아내에게 그 탓을 돌렸다. 어려서 오빠와 차별을 받았다는 아내의 말이 사실임을 믿게 한 순간이었다.
나는 꼭 고치고 싶었다. "장모는 하다하다 안 되니까 혹시나 해서 나를 불렀을 거야. 물론 내가 고칠 것이라고 기대도 안 하면서" 나는 장모가 원하는 기술깨나 있는 남자인척 가스레인지 주변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손잡이를 돌려보고 가스 밸브를 열었다 닫았다 해보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 뒤에서 장모님이 어떻게 하나 보고 있을 것인데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못하는데 네가 고칠 줄 알겠어, 그냥 올라가 봐" 장모의 입에서 곧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가스레인지를 뜯어보자" 나는 가스레인지 밑을 들여다보며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려고 했다.
이 때 드디어 장모의 입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됐어, 그만 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뜯었다가 사고나 치지." 나는 순간 짜증 섞인 화가 났다. '그럼 왜 불렀어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아니 할 수 있어요. 잠깐만 계시라니까요."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나는 큰 소리로 약간 화가 났다는 것을 암시하게끔 내 뱉었다. 순간 장모님도 당황한 것 같았다. 생전 말 대구도 못한 놈이 이런 말을 했으니 움찔 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심각해 졌다. 큰 소리는 쳤는데 사태의 실마리는 풀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꼬리를 내릴까. 여기서 더 나가서는 나에게 승산이 없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무능력을 보여주었으면 될 텐데 괜히 객기를 부렸다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역시 교회에 나간 효과가 있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 나 혼자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이 점도 장모가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였다. 가스레인지 모서리 부분에 건전지 표시가 보인 것이다. 그랬다. 가스레인지에 불이 붙지 않은 것은 건전지 수명이 다 되어서 불꽃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순간 나는 장모님의 노안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다 됐어요. 간단하구만."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손잡이를 돌리자 이글거리는 불꽃이 올라왔다. 파랗다 못해 시퍼런 가스 불꽃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진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였다. 그리고 이 번 추석 음식은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것 뿐이 아니었다.
돌아가려는 나에게 장모님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집에는 남자가 있어야 돼, 아들이 있어야 돼, 고생 했네, 올라가 쉬게" 이 순간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장모님에게 이미 아들이었던 것이다. "가스레인지야 고맙다. 자주 자주 고장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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