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함께하는 카이스트인권학교에서 강의중인 김조광수김조광수 <동성애자 인권연대 친구사이 대표>
대전충남인권연대
김조광수 감독이 초등학교 때, 이웃집에는 명문대에 다니고 있었던 형제가 자취를 하며 살고 있었다. 이 형제는 얼굴도 잘생겨서 이웃 아주머니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고 김조 감독을 비롯한 동네 아이들에게 저렴하게 과외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가 야반도주를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그 이웃의 두 남자는 형제가 아니고 '호모' 커플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김조 감독이 최초로 동성애자를 가까이서 접한 사건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의 수군거리는 대화를 들은 초등학생 김조광수는 어머니와 선생님에게 연이어 똑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호모가 뭐예요?"
어머니와 선생님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일치했는데, 깜짝 놀라며 그건 '병'이라고 대답했다. 병도 그냥 병이 아니라 더럽고 남에게 옮을 수도 있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그 형제가 사실은 동성애자임이 밝혀지고 난 후 동네 어른들의 180도 달라진 싸늘한 반응, 호모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어른들의 두렵기까지 한 대답은 오랫동안 동성애자 김조광수 감독을 지배한 어두운 기억이었다. 이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확인한 이후에도 자신과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스웨덴처럼 될 수 없는 걸까" 김조광수 감독이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차린 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학교의 한 남학생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때도 2차 성징이 빠른 아이들은 이미 <플레이보이>, <허슬러>와 같은 외국 성인잡지를 구해 와서 돌려 보았다고 한다. 이때 김조광수 감독은 여성들의 나체에는 심드렁했지만 남성들의 벗은 몸에는 호기심이 생기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자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김조광수 감독은 동성애가 '병'이라는 식의 그릇되고 부정적인 정보와 그에 따른 자기혐오 때문에 15살부터 19살까지의 청소년기를 자학하면서 고통으로 점철된 시절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조광수 감독의 방황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80년대 초에 대학을 입학한 그 역시 이른바 운동권 선배의 영향과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호모'라는 자신의 개인 문제에만 빠져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살아왔다는 자각을 한 김조광수 감독은 이후 1993년까지 10여 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 시기를 거쳤다.
이 시기, 김조 감독은 학생운동에 전념하면서 동성애자로서의 성적인 욕망을 숨기거나 억제하며 살면서도, 전 세계 혁명사 어디를 공부해 봐도 동성애자는 혁명세력의 적밖에 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 좌절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만난 게이 선배에게서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스웨덴으로 갈 거란 계획을 듣고, 그 선배에 대한 불만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왜 한국에서는 동성애가 인정되지 않는 걸까? 동성애자들이 노력한다면 한국도 언젠가는 스웨덴처럼 되지 않을까?"이후 김조광수 감독은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을 향해 동성애자인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노력은 주변 지인들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는 이른바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었다. 김조광수 감독은 강연에서 자신의 삶은 커밍아웃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커밍아웃이 자신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커밍아웃 이후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상에 대해서도 보다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이는 14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동성 간 결혼이 한국에서도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성 공개 결혼식, 커다란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