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대루 건물 모습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대루를 찍은 모습. 늦도록 마주할 만대루 현판의 글씨가 손님을 푸근하게 맞아들인다.
박영숙
병산서원을 처음 만난 것은 교직 6년차쯤 되었을 때다. 학년에서 의논하여 수학여행지를 영남의 유교와 불교문화권으로 정했다. 속리산이나 설악산을 주로 가던 시절이었지만, 유흥 위주의 여행을 지양하고 조상들의 정신세계와 미(美)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체험이 되도록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답사 장소에 맞는 주제를 주어 학생들 스스로 미리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 다녀온 후 보고서 과제도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진지한 자세로 답사하였다.
병산서원도 그 중 한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 길이 좁았다. 2~3km 되는 길을 한 학년 전체가 퉁퉁거리면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조선시대 학생들이 걸어갔던 통학길을 체험해 본 것이다.
그렇게 병산서원, 그리고 만대루와 만났다. 햇볕 따가운 긴 길을 걸어 만대루에 올라선 순간, 온몸의 세포가 마당에 핀 백일홍처럼 활짝 열렸다. 시야도 강과 산을 향해 넓게 열렸다. 사방이 열린 건물이었다. 기둥만으로도 우뚝했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기둥을 액자삼은 산수화가 드리워져 있었다.
건축학자 승효상씨는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 저서에서 병산서원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건축의 특징을 알려주고 싶을 때, 그가 시간만 있다면 나는 하회마을 언저리에 있는 병산서원으로 안내한다. 이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거의 반드시 그들은 이 놀라운 공간과의 조우로 깊은 사유에 들어간다."
나도 그랬다. 병산서원에 도착하여 만대루에 오르는 순간 시공간을 잊은 채 하염없이 앞만 바라보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 몸은 만대루가 아닌 우주의 넓은 공간에 떠있는 것 같았다.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후 최대 위기였다. 일본이라는 외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림 내부 동인과 서인의 갈등,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갈등은 외침(外侵)의 큰 파도 앞에서도 사그라들 줄 몰랐다. 격랑(激浪)의 난세를 치우지지 않는 균형감각으로 현명하게 헤쳐 온 분이 계시다.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이다.
정계 은퇴 후, 낙향한 그가 후학들을 위해 세운 곳이 바로 여기다. 낙동강 흐르는 화산을 병풍처럼 드리운 병산서원이다. 그리고 그는 하회마을을 휘감는 강 건너 산자락의 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의 교훈을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병산서원은 성리학 전성기에 학문과 현실 참여를 동시에 이룬 유성룡의 기개와 포부, 후손들에 대한 서원(誓願)이 고루 어린 곳이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황이 명종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쳤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시대의 부름에 응하여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그들이 몸담았던 공간에서도 분위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황의 도산서원은 꼬불꼬불 돌아 들어간 산중에 자리 잡고 있다. 오로지 공부에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에 비해 병산서원은 비록 낙동강이라는 천연의 해자(垓子)를 둘러치긴 했지만 모래벌에 당당히 나선 헌헌장부의 기상을 지녔다. 만대루에 서서 큰소리로 글을 읽으면 마주선 화산이 절벽 끝으로 감아올려 하늘에 계신 성현께 이을 듯하고, 시를 지어 낭랑한 목소리로 읊으면 낙동강 흰 물새가 이를 물어 온 세상에 고할 것 같다. 그 뿐 아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 만대루에 올라 슬피 탄식하면 병산이 함께 울어주고, 절세가인이 곡조 한 자락을 펼치면 강물도 아낙네의 푸른 치마를 풀어 너울너울 화답할 것 같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건강과 향유 위해 지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