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초 씨가 쓴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표지
위즈덤하우스
아메리카 종단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고은초씨는 생계를 위해 일주일에 사흘 일하고 나흘 책 쓰는 생활을 계속했다. 남들처럼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해서는 책을 제대로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간에 출판사의 사정으로 1년 정도 작업이 멈추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결국 2010년 7월에 고대하던 책이 출간됐다.
자기 인생에서 첫 책의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필자 역시 첫 책인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출간하고 교보문고에 가서 책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누군가가 내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보는지 한 시간을 넘게 서성대며 관찰한 적이 있다. 고은초씨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책은 저자와 독자의 두뇌를 이어주는 끈이다. 책을 통해 저자의 두뇌 속 경험이 독자의 두뇌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잘 쓴 책은 독자의 두뇌를 크게 뒤흔든다. 두뇌가 흔들리면 삶이 흔들린다. 기존의 여행서 대부분이 멋있고 화려하고 때론 요란하게 치장됐다면 고은초씨의 책은 찌질하고 힘들고 좌절감이 느껴지는 여행의 이면이 날 것 그대로 들어있다.
덤벙대고 조심성 없고 대책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꾸역꾸역 문제를 해결하고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습. 그것은 흡사 삶이라는 대책 없는 여행에서 비틀거리고 때로는 좌절하더라도 어떻게든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살아내는, 수많은 보통사람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런 솔직함이 두뇌를 흔들 수 있구나. 필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나보다.
"깊은 우울, 상실감, 침체, 무력감을 겪고 있던 분들이 누구를 통해서도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제 책을 읽고 뭔가 용기가 생기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실천했다는 연락이 왔을 때 정말 보람이 느껴져요. 이렇게 사고도 많이 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이 세계일주 하는 것 보니 자신도 할 수 있겠다고 얘기하더군요. 어떤 분은 출근길에 제 책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보신다더군요. 나중에는 책이 다 뜯어졌다고, 새로 사야겠다고 하신 분이 계셨어요. 보통 여행 책들이 화려한 여행이야기가 많아서 독자들을 위축시키는 면이 있는데, 제가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노력했던 부분이 솔직하게 쓰자는 것이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책을 쓰기로 한 저에게 유일하게 해 주신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가 문화관광부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메리카 종단 여행 떠난다고 할 때 심하게 반대하셨거든요. 제가 저 자신을 포장하고 싶고 미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아버지의 그 말이 크게 도움이 됐어요. 제 책 읽고 사표 냈다는 분도 있고, 한 달 여행이 일 년 여행으로 바뀐 분도 있고, 제가 여행한 경로 그대로 여행을 하신 분도 있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가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책을 통해 사람들이 여행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고, 내가 결심하고 맘먹으면 실제로 떠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것 같아요."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열어준 여행여행을 표현하기를, '길 위에 서는 것'이라고도 하고,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길을 가보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무가치하고 우울하게 여겨진다면 여행을 떠나보기를 권하고 싶다. 여행은 산다는 것의 경이로움을 알게 해준다. 쇼핑과 유흥으로 점철된 관광 말고, 도시를 떠나 대자연 속에 홀로 거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 고독, 기쁨, 희열, 두려움, 경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충만한 존재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배운다. 어렵게 얘기하면 성찰이고, 쉽게 얘기하면 사랑이다. 사랑조차 깨어질 수 있지만 한 번 진지하게 사랑을 만난 사람은 다시 사랑을 배울 힘을 얻는다. - 고은초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중에서수많은 여행기들 속을 들여다보면 눈부신 모험은 있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랜 기간 여행한 사람들이 특별나 보이고,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들처럼 거침없이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것 같다. 그들의 용감무쌍한 모험담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그 뒷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녀와서는 뭘 먹고 살지? 뒤처지지는 않을까? 지금 직장만한 일자리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등 일 것이다. 이런 엄중한 질문들은 고은초씨라고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여행을 다녀온 고은초씨는 귀국한 이후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이미 1년 전에 사직한 직장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일을 하고 새로 구해야 하는 집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높은 집세에 절망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열어줬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절대 살지 않았을 그런 종류의 삶 말이다. 원래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고은초씨는 2007년 아메리카 종단여행을 떠나기 전 문화관광부에서 주로 외국인들에게 한류를 소개하고 통역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피곤함'이 크게 다가왔다.
낯선 곳에서 우리 사회를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곳은 여유롭고 행복하고 삶의 질이 높아보였는데 서울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더라도 너무 바쁘고 피곤했다. 고은초씨는 그 차이가 비롯되는 지점을 '문화'에서 발견했다. 귀국 후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문화예술정책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고은초씨는 공공문화기업에서 일하며 문화재생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다.
녹슨 기차 같은 도시 서울의 삶을 벗어난 고은초씨"여행을 통해 한국과 외국의 차이를 느끼면서 서울이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돈을 버는 기계처럼 살면서 다들 행복하지는 않고, 그저 한 달 벌어서 다음 한 달을 근근이 사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 너무 싫은 거예요. 소비 자체가 마치 삶의 목적인양 사는 것도 싫고요. 제가 당시 여행을 다녀와서 문화기획 쪽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며칠은 꼭 심야택시를 타고 가고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니 건강도 안 좋아지고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기획자로 쌓아온 경력을 가지고 문화적 기반이 부족한 지방으로 가서 새로운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큰 돈 벌지 않고 생계만 유지할 수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에요. 깊게 고민하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가족들이 사는 군산으로 이사를 했어요. 지금은 일단 서울을 떠난 이 안정감과 자유로움, 편안함을 즐기고 있고요. 문화기획사업을 군산에서 시작하고, 거창한 것은 못하더라도 일단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공동체를 만드는 거죠. 지금은 외국을 나갈 생각이 별로 없어요.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또 하나의 여행이거든요. 삶 자체가 여행이니까요."돈을 연료로 해서 같은 궤도만을 무한반복하며 돌아대는, 녹슨 기차 같은 도시 서울의 삶을 벗어난 고은초씨. 그녀는 군산으로 세계일주 만큼이나 긴 여행을 떠났다. '문화'를 통해 바쁘고 피로한 도시의 삶과는 다른,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이 지방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녀는 여행으로 낡은 돈을 잃고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이 어찌 남는 장사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여행서를 쓰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험자로서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지를 모르겠네요. 음… 사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너무 많은 책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무라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한다는 느낌도 들거든요. 글 쓰는 것 자체가 업인 작가 분들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그냥 자기의 경험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 내 얘기를 반드시 책이라는 형태로 써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의 추억을 남기고 싶으면 블로그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책이 될 만한 내용이 명확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시욕이나, 이런 것도 해봤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는 책이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해주신 조언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어요.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쓰는 것."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고은초 글.사진,
예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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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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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후 서울이 싫어졌어요, 왜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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