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나 목판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닙니다.
임윤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컴퓨터 자판을 보고 '글씨'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가 프린트되어있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글자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로 치건 손으로 쓰던 '사랑'이라는 글자는 인간들이 교감하거나 주고받는 사랑, 사랑하는 마음과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표시입니다.
청주에는 '고인쇄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을 흔히들 '직지박물관'이라고도 부르는 건 현존하는 금속 활자본 중 세계 최고인 직지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쇄문화유산적인 가치로만 봐도 참 자랑스러운 게 <직지>입니다. 하지만 <직지> 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금속활자나 인쇄술은 직지에 담긴 의미(뜻)를 인쇄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입니다. 사랑이라는 글씨를 타이핑할 수 있는 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쇄물 자체가 <직지>가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교한다면 인쇄물 자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직지>에 담긴 뜻이야 말로 백운 화상이 <직지>라는 손가락을 통해서 가리키는 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 말엽 백운 화상(1299~1375)이 펴낸 <직지(直指>의 원명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이를 줄여서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고들 합니다. 이 <직지>에는 과거 칠불과 인도의 28조사 그리고 중국의 110선사들이 남겨 놓은 귀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직지>에 담긴 뜻이 달처럼 밝고 제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늘을 사는 우리, <직지>를 읽는 독자들이 직지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는 정도에 그친다는 건 그냥 한 권의 인쇄물,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헛된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읽으며 새기려고는 하나 이런 이유와 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새길 수 없다면 이 또한 달을 보려고는 하나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허공만을 뒤적거리는 답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직지에 대한 단상 <직지, 길을 가리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