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을 버리고도(?) 기분 좋았던 날

아동원 아이들에게 '일일 아빠' 되기

등록 2013.09.08 17:43수정 2013.09.1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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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돌아오는 일요일이 남자들은 오히려 피곤하다. 어디 가까운 곳은 갈 데도 마땅치 않다. 하루 종일 잠이라도 푹 자고 싶지만 일요일만 기다리는 자식들을 보고 있으면 내 몸의 잇속만 차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빠 노릇 하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일요일인 지난 8일엔 오전에 영화도 보고 점심 땐 소문난 갈비집에서 맛있는 고기도 먹기로 아이들과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번 약속은 머리가 무겁지도 않고 오히려 설렌다. 이날은 내 자식들이 아닌 아동원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고모집 앞에서 손 흔드는 아들 영찬과 딸 서빈 아빠보단 부루마블이 더 좋은 모양이다. 나 보고 얼른 가란다.
고모집 앞에서 손 흔드는 아들 영찬과 딸 서빈아빠보단 부루마블이 더 좋은 모양이다. 나 보고 얼른 가란다.이혁제

얘들아 미안해, 오늘은 아빠를 양보해줘

아내가 일요일 오전에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늘 내 차지였다. 아이들 눈치 보며 어떤 핑계를 대고 나갈까 고민하다 가까이 사는 여동생 집에 맡기기로 하였다. 옷을 차려입고 나가려하자 아이들도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고 옷을 찾아 입는다.

큰애에게 오늘은 다른 아이들과 놀기로 했다고 이야기하자 의외로 잘 다녀오라고 한다. 아빠랑 노는 것보다 사촌들과 부루마블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부루마블을 챙기더니 오히려 즐겁게 집을 나선다. 속으로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가도 조금은 섭섭하다.

극장에 도착하니 오늘 함께 할 '건목회'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사)건목회는 목포 지역의 청년 봉사단체다. 평소 같으면 30분은 기본적으로 늦게 나올 아빠들인데 오늘은 다들 서둘렀나보다. 서로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는 사이 아동원 아이들 40여명과 선생님들이 대합실로 들어왔다.


처음에 어색하긴 서로가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들과도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은 아빠들인데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과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마는 일부러 말을 걸어보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매일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는 아저씨들인 줄만 알았는데 참 순진한 면이 많은 동료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모임이 참 좋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드래곤볼' 7개


오늘 볼 영화는 애들이 좋아하는 <드래곤볼Z : 신들의 전쟁>이다. 일요일 조조영화인데도 극장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도 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아빠와 자식들이다.

시간이 흐르자 여기저기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는 아빠들이 보인다. 아빠들의 집중력을 '드래곤볼'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스크린을 뚫을 지경이다. 요즘은 아동 시설에서도 여느 가정처럼 컴퓨터나 비디오 등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텐데, 이렇게도 즐거워하는 것은 그들이 느끼는 또 다른 무엇 때문인 것 같았다.

7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드래곤볼 오늘 아이들 모두에게 드래곤볼 7개가 생겼으면 좋겠다.(<드래곤볼Z : 신들의 전쟁> 한 장면)
7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드래곤볼오늘 아이들 모두에게 드래곤볼 7개가 생겼으면 좋겠다.(<드래곤볼Z : 신들의 전쟁> 한 장면)도에이

옆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일부러 말을 걸어보았다. 이 아이들은 오늘 어떤 행사에 왔는지도 모르는 듯 나보고 "누구냐"고 대뜸 물어보았다. "오늘 너하고 같이 영화도 보고 갈비도 먹으려고 온 아저씨"라고 소개하였더니 그제야 경계심을 푼다.

하지만 이 아이는 영화 속 드래곤볼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볼 7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한 마디, "몰라요"였다.

이 아이가 드래곤볼 7개를 모으면 어떤 소원을 빌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짜 아빠가 아닌 진짜 아빠가 아닐까 싶다.

맛있는 갈비집 앞에서 기념 샷 1남 1녀를 둔 유재갑 회원의 아이들이 오늘은 바뀌었다.
맛있는 갈비집 앞에서 기념 샷1남 1녀를 둔 유재갑 회원의 아이들이 오늘은 바뀌었다. 이혁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갈비야 고마워!

영화가 끝나고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가 기다리던 하이라이트 갈비집에 도착하였다. 이 갈비집은 왕갈비로 유명한데 숯불에 구워 큼직큼직하게 썰어 상추에 싸서 먹으면 정말 맛있는 집이다. 이 집 사장님도 우리 모임의 회원이다. 그래서 서비스가 무척 좋았다.

갈비는 맛은 있는데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가 고역이다. 집게를 들고 이리저리 뒤집어주어야 하기에 구이 담당은 늘 아빠들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아빠들이 구이 담당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을 먹고 나오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다 먹을 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식들이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던 부모의 심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솔직히 가족들과 외식을 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정말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내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꽤 넒은 갈비집이 온통 아이들로 북새통이다. 각 테이블에는 일일 아빠 한 명씩 배치가 되어 집게를 들고 갈비를 굽느라 야단이다. 같이 온 선생님들도 즐거운 표정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고 연신 우리들에게 고맙단다.

갈비야 빨리 익어라! 갈비 굽는 폼이 평소에도 많이 해본 솜씨다.
갈비야 빨리 익어라!갈비 굽는 폼이 평소에도 많이 해본 솜씨다.이혁제

우리가 생각했던 아동원 아이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느 화목한 가정집 아이들처럼 밝은 표정이다. 어떤 아이는 음료수 잔에 무엇인가를 담아 와서 마셔보란다. 주변 아이들은 내가 마시기만 기다렸다 깔깔대고 웃어댄다. 콜라와 사이다를 섞었단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조금 있다 다른 아이들도 가져와 마시란다. 이날 '폭탄 음료수'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속이 느끼하다.

우리 지역 국회의원님도 점심 때 동석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행사도 많을 텐데 이렇게 소소한 모임에 참석해주어 고맙지만 챙겨드릴 여유가 없다. 아이들 갈비 굽기가 먼저기 때문이다. 이해해주실 거라 믿고 우리들은 아이들에게만 신경 썼다.  

어느덧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과 헤어졌다.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왠지 짠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아빠들끼리 모여 잠시 수다를 떨었다. 아들밖에 없는 동료는 역시 딸이 최고란다. 딸들의 귀여움을 오늘 처음 느껴본 모양이다.

여동생 집에 애들을 데리러 갔는데 더 놀다 가고 싶단다. 아빠보다 부루마블이 더 좋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오늘 만났던 아이들도 아빠보다 부루마블을 더 좋아하는 환경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목회 #아동원 #일일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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