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이 '9월 17일'이 되지 못한 까닭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 12] 충칭에서

등록 2013.09.08 17:17수정 2013.09.0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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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은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임시 수도였다. 일본에 쫓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해로부터 이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 내륙의 산악지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피난 나와 충칭에 자리 잡았다. 육로가 높은 산으로 전부 막혀 진입할 수 없었던 이곳에 일본군은 공중 폭격을 하여 시가지를 거의 초토화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간 복구하여 현재 인구는 3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분열에 폭탄선언을 하다


장준하 일행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목숨을 담보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광복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린취안에서 김학규 주임이 그들을 말리며 한 말과 라오허커우에서 광복군 분견대가 그들에게 충칭으로 가지 말라며 한 말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충칭에 살고 있는 많지도 않은 조선인에 비하면 파당이 너무도 많았다. 각 단체마다 정당마다 그들을 위한 환영회를 경쟁적으로 열었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기꺼이 그들의 환영식에 참석했으나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환영회는 형식적으로는 그들을 위해서 열었지만 대부분 자기 당을 선전하고 남의 당을 비방하면서 결국은 장준하 일행들을 자기들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들었던 임시정부의 분열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들은 신물이 났을 것이다. 장준하 일행은 앞으로의 모든 환영회를 무조건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 후에는 각 당이 개별적으로 포섭하는 공작을 벌였다.

장준하는 실망이 분노로 변해 충칭에 온 지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교포들이 전부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여 그동안 보고 느낀 임시정부의 분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는 요즈음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솔직히 말해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중략) 이곳을 떠나 다시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본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본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하여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 중략 -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돌베개> 286쪽)

한반도 공중 침투를 위한 특공대가 되다


임시정부의 정치상황에 실망을 하고 있던 중,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이 시안(西安)에서 미군과 합작하여 한반도 침투 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 중이란 말을 듣고 일부는 충칭에 남고 나머지 30여 명이 4월 29일 시안으로 갔다. 배웅을 나온 김구 주석은 4월 29일 이날은 윤봉길을 사지로 보낸 날이라고 말하며 윤 의사와 바꾼 회중시계를 직접 그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청사에 마련된 김구 주석 흉상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에 마련된 김구 주석 흉상과 함께 이규봉

이범석은 항저우 군관예비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다한 인물이다. 1920년 10월에 청산리전투에 참가했으며 1923년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다. 1934년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이 설립되자 교육대장으로 이청천을 도왔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장에 임명됐다.


장준하 일행은 1945년 8월 20일 한반도에 침투할 예정으로 미국의 첩보부대인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서 3개월간 특수훈련을 받았다. 미국이 일본 본토로 쳐들어가기 전에 한반도로 먼저 들어가 국민군을 조직해서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군을 교란하는 역할이 그 목적이다. 하지만 침투하면 거의 사살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범석 장군은 종전 후를 걱정하여 장준하를 침투조에서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안 장준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닌 유서를 썼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돌베개> 323쪽)

그는 머리를 깎고 물건을 정리하여 소포로 만들어 결국 이범석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장준하는 서울지구 침투 공작을 맡았다.

마침내 1945년 8월 14일 새벽 4시 한반도로 진입하기 위해 미군 수송기로 시안을 떠났다. 그러나 14일 아침 도쿄 만에 진입하던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습격을 받자 위험성이 큰 것으로 보아 진입을 포기하고 시안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8월 15일, 그렇게 기다리던 조국 땅에 침투도 하지 못하고 해방이 됐다. 전승국으로 누릴 수 있던 마지막 기회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놓친 것이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쾌거로 설립하게 된 한국광복군

한국광복군은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두 의사의 쾌거로 설립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 장제스와 면담을 하게 된 김구는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시켜달라고 요청을 했다. 이에 장제스는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인 청년을 위한 특별반을 편성하게 한 것이다. 1934년 이청천이 1기생을 맡아 훈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시안에서 한인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재정지원의 대상을 임시정부로 단독 지명하고 중국 내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요구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임시정부 주도의 좌우합작 항일전선에서 이탈하자 김원봉은 잔류파와 함께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 결과 광복군은 제1지대장에 김원봉, 제2지대장에 이범석 그리고 제3지대장에 김학규를 임명했다. 시안에는 한국청년훈련반을, 린취안에는 한국광복군특별훈련반을 두어 초급장교를 육성했다. 광복군은 인도∙버마전에 파병하여 연합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했고 미국전략사무국과 협력하여 국내에 진입시도를 했다.

 임시정부 청사에 있는 한국광복군 배치도
임시정부 청사에 있는 한국광복군 배치도 이규봉

일본이 패전한 후 미군정은 정치적인 이유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 결과 1946년 6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한국광복군은 해체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새롭게 건국되고도 대한민국 국군은 일제와 투쟁한 자랑스러운 한국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않아 한국광복군은 그 사령부조차 복원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놓여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날은 광복군이 창설된 9월 17일이 아니고 한국전쟁 때 국군이 삼팔선을 넘어간 날로 지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다. 우리나라의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는 그 뿌리를 광복군을 탄생시킨 신흥무관학교에 두지 않고 미국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와 그 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두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국군이 창설된 그 시기에 국군의 요직은 일제와 투쟁한 광복군들이 거의 다 배제된 채 일제에 충성한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등 친일파가 모두 차지했고 그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이어오기 때문이다.

에너지 낭비가 심한 중국

보름간 중국의 도시와 시골을 골고루 다니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교통수단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이 전기자전거와 전기오토바이임을 알게 됐다. 이제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일반적인 자전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이 전기자전거이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소리가 안 나는 전기오토바이를 보며 중국이 공해 방지에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은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 자동차를 사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대신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산다. 그런데 동력은 모두 전기다. 가난한 그들이 전기자전거를 타고 전기오토바이를 이용한다는 것은 석유값보다 전기값이 싸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난양이나 충칭과 같은 거대 도시를 걸어 다녀 보니 그 더운 날씨에도 가끔 건물 앞을 지나다 보면 의외로 시원한 때가 많았다. 그 이유는 모두 문을 열고 에어컨을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을 여는 이유는 손님을 그만큼 더 많이 오게 하려고 하는 상술이지만 그 이면에는 역시 싸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보통 전기의 에너지 효율이 30~4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렇게 값싼 중국의 모든 전기가 수력이나 화력발전소에서만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많은 서민들이 쉽게 사용하고 낭비할 정도로 왜 이렇게 전기값이 쌀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곳이 수력이나 화력도 아닌 핵발전소라는 것이다. 보름간 다니면서 원자로 같은 큰 건물을 먼발치에서 서너 번 봤다. 반드시 그 발전소가 핵발전소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화력 아니면 핵발전소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실제로 핵발전에 의한 전기값은 결코 싸지 않다. 싸다고 하는 것은 속이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핵발전으로 야기될 수 있는 사고에 배상하는 비용을 전기값에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명한계가 지난 핵발전소를 해체하고 방사능 오염을 관리하는 등의 환경 비용도 실제적인 비용보다 훨씬 낮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발전에 드는 비용만 주로 계산하여 공급하니까 단가가 싸지고 그래서 전기값이 싸게 보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지금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흥청망청 쓰고 있는 그 대가를 그들의 후손들은 그대로 껴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후손의 몫을 미리 가져다 마구 써 대고 후손들은 써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조상 빚을 대신 갚아주게 될 것이다.

중국은 핵발전소가 엄청 많다. 201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발표한 세계원전건설 현황에 따르면 중국이 건설 중인 원전은 27개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중국은 이미 27개의 핵발전소가 있고 추가로 50개를 8~10년 안에 건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핵발전소는 내륙에도 있지만 특히 중국의 동해안에 많이 설치되어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중국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일본에서 사고가 생겼다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특히 중국 같은 곳에서는 사고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라도 후꾸시마 핵발전소처럼 아니 체르노빌 핵발전소만큼이라도 사고가 난다면 중국이 당하는 피해보다 훨씬 더 깊은 피해를 북한이나 대한민국이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중국과 대한민국은 매우 가까운 나라이다. 중국에서 한반도를 지나 일본으로 가는 편서풍은 방사능 물질을 순식간에 한반도로 몰고 갈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을 방도도 없고 고스란히 방사능 물질을 덮어쓰게 된다. 중국에 보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냥 당하는 것이다. 북한이나 대한민국은 국가의 기반이 흔들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우려를 중국 정부에 전달하기는커녕 아직도 핵발전소를 더 짓고 외국에 팔아먹을 생각만 한다. 전기를 싸게 사용하고 싶은 탐욕에 중국인이나 우리나 미래는 걱정하지도 않는다. 오직 핵발전소가 사고 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지금도 민중들을 속이고 있다. 아무리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더라도 사고가 날 경우 입는 피해가 천문학적이면 사고에 대한 기대값 즉 피해가 엄청 크다는 것을 왜 모르는 척 할까? 아! 불쌍한 군상들이여!
덧붙이는 글 <한국문화신문>에도 투고
#핵발전소 #한국광복군 #특공대 #폭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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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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