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원 "이석기 체포동의안 결사 반대"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의원단, 당원들이 2일 오전 국회본청 계단에서 '국가정보원의 내란음모 조작 규탄 및 체포동의안 원포인트 본회의 반대'를 위한 전국지역위원장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체포동의안 결사 반대, 국정원 해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남소연
100일 전에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은 특출한 기억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정원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관심의 초점이 모두 '5월 12일 합정동 강당'으로 모아지고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기란 무척이나 고단하다. 국정원은 녹취록을 슬금슬금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에 비해 통합진보당(진보당)의 대응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 안 했나?"는 질문 앞에 "우리의 취지는..."으로 대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물론 당시 강당에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조사 하나, 토씨 하나에도 어감이 달라지고, 뭘 빼고 뭘 넣는지에 따라 취지가 왜곡될 수 있음은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논란에서 확인된 바다. 이것을 반박해야 겠는데 의존할 것은 기억밖에 없으니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변명이 아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100일 이전에 참여한 강연회나 토론회, 혹은 누군가와 진지하게 대화한 경험을 떠올려 보라. 토씨하나, 조사 하나의 왜곡을 짚어낼 방도는 없다. 막연히 "내가 말한 취지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법정증거로 사용될 수 있느냐의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무슨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동영상 (편집본 말고) 원본 공개 밖에 없다. 국정원이 자신감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법적 효력이 없더라도 지금까지의 언론 플레이처럼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법적인 해결이라기보다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5월 12일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본질이 보인다. 이 사건 역시 좋게 봐줘도 '국정원의 무능'일 수밖에 없다.
추론해 보자. 소위 '녹취록'이 상당부분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통합진보당에서도 발언 취지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하지 않는 만큼, 5월 12일 합정동 강당에서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한 논의들이 오고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런 저런 짜깁기 보도가 판을 치고 있지만, 주요 논지를 골라내면 "만일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물리적 수단을 포함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참석자가 장난감 총 개조, 사제폭탄, 통신시설 마비 등의 엄청난 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정원은 이 사실을 즉시 인지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국민들도 '이러다 정말 전쟁 터지는 것 아니야?'라고 한번 쯤 생각했을 5월 당시, 국정원은 100여 명의 무리들이 '정말 전쟁이 터진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국가 기간 시설을 마비시키려는 모의를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사실을 파악한 국정원의 반응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사라졌다. 이것은 내란음모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이 만에 하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조건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정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임박했던 5월 12일에는 내란을 막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그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에 관련자를 구속하고 사건을 공개하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만일 국정원의 주장처럼,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나 몇몇 무리들의 '과대망상'이 아니라 실제 내란의 가능성이었다면, 왜 그것을 파악하고도 좌시했는가? 실제 내란이 일어나 국가 기간시설이 파괴되고, 요인이 암살당하고, 개조한 장난감 총알이 휭휭 날아다닌 이후에 잡으려고?
표창원 경찰대 전 교수 역시 시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표 전 교수는 지난 8월 29일 그의 블로그에 "3년 간의 내사', '2012년 5월 비밀집회에서의 발언' 이 핵심증거...라면, 그리고 '총', '폭파', '인명살상' 등의 극히 위험한 내란 예비음모라면, 보다 일찍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체포를 했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으며 "특히, 핵심인 이석기 의원을 체포하려면 국회 회기 중이 아닌 시기에 영장 발부받아 체포할 수 있었잖아요?"라고 질문했다.
더구나 그것이 정말 이견의 여지가 없는 내란예비음모였다면, 복잡한 국회동의절차와 상관없이 5월 12일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그들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나라가 뒤집힐 내란음모'를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에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절차가 복잡하지만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될 국회 체포동의안 절차를 밟았다. 이것은 국정원의 주장을 모두 순수하게 신뢰하더라도 심각한 무능에 다름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이런 국정원에게 정말 나라와 자신의 안위를 맡길 수 있는가?
내란음모 파악하고도 국정원 왜 안 움직였나 물론 국정원은 자신의 주장을 언론에 찔끔찔끔 흘리는 방식으로 '시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지난 8월 31일 <국민일보>는 '공안 당국 관계자'의 입을 빌려 "최근 주시하던 RO조직 연락책이 잠적하고 내부 조력자와 연락이 끊기는 등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어 "국가정보원 등은 내사가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지난 28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과 체포에 나서며 공개수사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5월 12일 행사에 참여해 관련 자료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내부 조력자'가 일주일 이상 연락이 두절된 것이 갑작스런 언론노출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