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의 자존심 야은 길재 선생의 초상
박도
아무튼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시민기자로 그리고 역사학도로 <항일유적답사기> <영웅 안중근>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등의 근현대사 관련 책과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의 사진집, 장편소설 <제비꽃>도 펴냈다.
33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허형식 장군 때문에 한 평범한 고교 국어교사가 역사학도로 인생길을 바꿔, 나는 정년이 보장된 교사직도 팽개치고 강원도 산골까지 들어오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늘 나에게 집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을 가리키시면서 선산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 나는 충절의 고장이 '왜 현대사에는 그런 인물이 없을까' 하여 젊은 날 많이 방황하기도 했다. 허 장군을 만난 이후 나는 글방 책장에 장군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그분 이야기를 소설로 시작했으나 매번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이 그분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과 만주독립운동사에 대한 역사공부 부족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는 꼭 탈고하리라고 다짐하지만 이 말조차 혹 실천하지 못할까봐 매우 조심스럽다.
허형식 파르티잔. 그분은 내 인생길을 바꿔놓은 위대한 영웅이요, 혁명가다. 삼가 북만주 산골에 외로이 눈을 감은 그분의 명복을 빈다. 1942년 8월 3일 그분은 토벌대의 총탄에 쓰러진 뒤, 머리조차 효수당하고, 남은 시신조차 짐승들의 먹이가 됐다고 전해진다.
지난 8월 24일, 경기도 강화에서 1박 2일 작가회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때 통영에서 오신 최정규 시인과 같은 방을 썼는데, 그분은 당신 고향 출신 청마 유치환의 '수'(首)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하셨다. 아마도 청마가 노래한 '수'(首)의 비적은 바로 그 시절 허형식 장군과 같은 독립전사일 것이다. 그런데도 통영에서는 청마의 친일 행각은 덮은 채 기념사업만 한창이라고 격분했다.
그런 일이 어찌 통영뿐이겠는가. 온 나라에 겨레의 꽃인 무궁화보다 사쿠라꽃이 더 만발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 진짜들은 목이 잘려 짐승의 밥이 된 세상에 가짜들은 비굴하게 살아남아 애국자인 양, 사회 전 분야에 자손대대로 설쳐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인물의 진가도 까마득히 모른 채, 그저 돼지처럼 콩과 보리도, 똥과 된장도 구별치 못하며, 아니 구별치도 않고, 마구 먹어대며 '꿀 꿀'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역사가 매몰된 세상은 한낱 짐승의 세계나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