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구룡폭포. 중국인들은 이를 장백폭포라 부른다. 남이 장군은 백두산에 올라 남아다운 기개를 노래로 읊었지만, 이는 역적 모의를 했다는 참소로 자료로 이용된다.
정만진
결국 원상 세력이 사건을 일으킨다. 예종 즉위 직후 혜성이 나타난 날, 병조판서에서 밀려난 채 마침 궁궐에서 숙위를 하고 있던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하자, 남이를 배신하고 훈신 세력에 붙은 유자광(柳子光)이 남이 일파가 역모를 도모한다고 고발, 예종이 원상 세력에 합세하여 마침내 1468년 남이 등을 죽인다. 이를 '남이의 옥(獄)'이라 한다.
남아의 기백을 노래한 남이의 '호기가'흔히 고시조를 분류할 때,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등을 회고가(懷古歌)라 한다. 박팽년의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등은 절의가(節義歌)라 한다. 윤선도의 '우는 것이 뻐꾸기냐 푸른 것이 버들숲가 / 어촌 두어 집이 냇속에 들락날락 /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 등은 강호가(江湖歌)라 하고, 정철의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등은 오륜가(五倫歌)라 한다.
그런가 하면 김종서의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요' 같이, 남아의 기운찬 포부를 노래한 시조를 호기가(豪氣歌)라 한다. 남이가 호기가 한 수를 아니 남겼을 리 없다.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대명천지(大明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겼에라언제나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 볼까 하노라
큰 칼을 뽑아들고 백두산에 오르니 멀리 중국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땅은 전쟁의 먼지가 자욱했다. 게다가 남쪽으로는 왜구가 창궐했다. 언제 이 땅에서 전란을 몰아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안겨줄 것인가! 남이는 장군으로서 옹골찬 포부를 힘차게 노래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은 이 노래를 두고 임금과 조정을 비난했다고 몰았다. 태평성대를 암흑시대로 읊조렸고,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드러냈다고 모함했다. 당연히 그의 한시(漢詩)도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頭滿江水飮馬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後世誰稱大丈夫 훗날 누가 그를 대장부라 하겠는가반대 세력은 이 시에서 살짝 글자 하나를 바꾸어 예종에게 참소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頭滿江水飮馬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男兒二十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後世誰稱大丈夫 훗날 누가 그를 대장부라 하겠는가적을 몰아내어 나라에 평화가 안착하도록 하겠다는 애국애족의 노래는 순식간에 나라를 얻어 왕이 되겠노라는 야심을 드러낸, 임금에 대한 선전포고의 글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 등에 의구심을 가지고 원상 세력을 더 가까이했던 예종은 이 시를 받아들고 분노했다. 남이는 역적으로 몰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