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의 살얼음 승부? 하얀 소복? 한자말 바로잡기

한자말의 그릇된 사용으로 살피는 한자 병기의 중요성

등록 2013.08.29 09:21수정 2013.08.2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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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이라 하면, 토박이말(순우리말)을 비롯해 한자말과 들온말(외래어)도 아우른다. 그 가운데 한자어는 우리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고갱이 노릇을 할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한자말은 토박이말과 달리 한글이란 문자로 그 소리만을 표기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설욕이란 말을 곧잘 쓰지만, 雪(눈 설)과 辱(욕될 욕)로 구성된 '부끄러움을 씻어내다'라는 본디 담긴 뜻은 한글로만 표기할 때 알 길이 없다. 좀 야박하게 표현하자면, 한자 병기 없는 한자말은 외국어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들온말과 대차가 없다. 이런 까닭에 한자 병기 없는 한자말은 결국 또 다른 외래어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아울러, 한글의 단독 표기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문제들도 여럿 있다. 본의를 제대로 몰라 섞갈리게 사용한다거나, 같은 뜻을 중복 표기하는 동어반복은 흔하게 볼 수 있고, 심지어는 그 뜻이 전혀 맞지 않아 엉뚱하게 쓰이는 경우도 잦다.

지금부터 장사진(長蛇陣), 소복(素服), 박빙(薄氷) 따위의 한자말을 가지고, 무엇이 문제인지, 무슨 연유에서 쓰임새가 그릇된 것인지 살펴보자.

장사진(長蛇陣)의 한자를 풀어보면, '긴 뱀과 같이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이로 한자 자체에 그 뜻이 그대로 드러나듯 긴 줄을 선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뜻의 장사진과 이따금 헷갈려 쓰이는 말로는 북새통이 있다. 북새통은 토박이말로 '많은 사람이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며 법석이는 상황'을 형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역점 롯데마트 매장 일본인 관광객들로 장사진'이라는 기사 제목은 '장사진'보다는 '북새통'이 걸맞을 터이다.

동어반복 문제에서 흔히 아는 예로 '역전 앞'을 들 수 있다. '역전(驛前)' 안에 이미 '앞'이란 뜻을 품고 있음에도 '앞'을 '역전' 뒷가지에 붙여 쓰인다. '역전 앞'이란 말은 사람들의 말이 굳어진 까닭에 '앞'자를 빼고 쓰기에도 허전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얀 소복'도 동어반복의 한 예이다. 소복(素服)의 한자는 素(본디/흴 소)와 腹(옷 복)으로 이루고 있어, '소복'만으로 '하얗게 차려 입은 옷'의 뜻이 정확히 드러난다. '하얗다' 라는 뜻의 소(素)가 이 말에 들어있는 줄 안다면 과연 '하얀 소복'이란 동어반복이 부끄럼 없이 만연할 수 있을까?

'박빙'은 薄氷 '엷을 박'자와 '얼음 빙'자로 이루어져 있다. 토박이말로 바꿔 말하면 '살얼음'이다. 신문 기사 일부를 보자.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이날 경기서 삼성이 4회 2-0으로 리드를 잡으며 살얼음판 승부가 이어졌다." 한자를 알고 나면 따온 기사 내용은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이날 경기서 (중략) 박빙의 승부가 이어졌다"든지, "살얼음판 승부가 펼쳐진 이날 경기서 (중략) 살얼음판 승부가 이어졌다"로 읽히는 정말 웃지 못할 말이 되어 버린다. '박빙'은 한자말이요 '살얼음'은 우리말이란 사실을 잘 모르고 쓴 기사로 여겨진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말글살이에서 나타나는 한자말의 그릇된 쓰임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터이다. 우리말을 아끼는 사람 가운데는 한자 병기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맞서고 있다. 반대론자는 크게 이유 두엇을 내세운다. 첫째, 한글만으로 표현과 소통이 가능하다. 둘째, 한자말 보다는 한자가 필요 없는 토박이말을 사용하자. 한 발 더 나아가 한자 병기는 '한글 죽이기'요 '과거로의 회기'로 치부해 버린다.


필자가 보기에 토박이말은 말맛이 나는데다, 순우리말 사용 및 한글보호라는 애국적 요소도 갖추고 있는 덕에 한자 병기 반대론자가 상대적으로 찬성론자 보다 더 큰 명분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봐야 할 터이고 말을 올바르게 부리기 위해서 장사진, 소복, 박빙의 쓰임을 반성거리 삼아 한자 병기도 헤아려봄 직하다.

#한자 교육 #한자 병기 #국한혼용 #올바른 국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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