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장면.
갑자기 악화된 병세로 인해 사진관 문을 닫게 된 정원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사진관 주변을 맴돌다가 야속한 마음에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져보기까지 하는 다림.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 무렵 잠시 퇴원한 정원은 사진관에서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은 후 영원히 다림 곁을 떠난다. 정원의 소식을 알 리 없는 다림은 어느 날 다시 문 닫힌 사진관을 들여다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를 뜬다. 다림의 뒤로 사진관 진열장 안에 활짝 웃는 다림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은 정원이 다림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일까. 다시 볼 수도 없고 고백하지도 못한 사랑이지만, 한여름에 시작한 사랑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추억으로 마무리된다.
디지털 시대라도 사람에게는 아날로그가 필요해1998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필름을 손으로 끼워 넣는 수동카메라와 동네 사진관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과 감성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최근에도 영화를 찾아보고 애잔한 감동을 고백한 후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디지털 시대라도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얻는 법이다.
영화가 나온 지 1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지털 시대로 옮겨온 우리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도시인들은 '삐삐'가 아니라 아예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 연락하고, 언제 올지 몰라 애태우던 버스는 이제 정거장 스크린에 친절하게 '몇 분 뒤 도착'까지 안내된다.
매일 변화의 한 가운데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 변화의 정도와 깊이를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1998년의 어느 날과 지금의 어느 날을 딱 잘라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다. 특히 이산의 현실 속에서 애달픔과 그리움의 아날로그적 감정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에게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13년 7월 말 현재 약 13만여 명(12만8824명)이 신청한 이산가족 상봉희망 대기자 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12만8824개의 인생극장이며 눈물이다. 그나마 그중 현재 7만2882명만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 뒤 집계에서는 그 수가 얼마나 줄어들지 모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사진사 정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앞두고 너무나 늦게 알아버린 사랑의 감정에 애달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평생 안고 애달파 하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더욱 사무치게 애달파 하는 이산가족 이웃들이 13만 여 명에 달하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단골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랫말이 있지만, 이제는 누가 이 사람을 알더라도 만나지 못하는 세월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은 더욱 시급한 남북한의 인도적 과제이다.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지난 8월 5일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어 67억 상당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결정하면서 이중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사업에 7억89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직접 만나지 못하면 디지털 영상편지라도 남겨놔야 한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도 인간의 만남은 아날로그적이어야 한다. 나중에 이산가족들이 영상편지를 보다가 감정이 복받쳐 TV 스크린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끌어안아도 그건 디지털 기계일 뿐이다. 헤어진 내 부모형제가 아니다.
남북관계 발목 잡는 '연계론'의 덫을 피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