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강변의 조각공원원시 시대의 초기 인류가 새겼던 조각그림들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조영삼
나그네가 지난 1월 1일 아침 담당교도관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 뱉은 첫 일성은 "정말 오랜만에 친정에 돌아왔는데 씨암탉 한 마리 내 놓으시지요. 하하하"라고 말했습니다. 청계산 자락 국립호텔 방은 나그네가 이십 여 년 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진행된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 방문사건'에 연루되어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요.
신기하게도 정년을 앞둔 어느 나이 지긋한 교도관이 오래 전의 나그네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도 나그네가 조금 별났나 봅니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유수의 국립호텔답게 각계의 거물(?)들과 어렵지 않게 조우할 수 있었습니다.
만사형통의 이상득옹은 이른 아침 운동시간에 긴긴 회랑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어김없이 병색 완연한(?) 모습에 마스크로 얼굴 거의 전부를 가리고 담당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처량하고 불쌍하게 걸어갔습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전형을 보는 듯 했습니다.
상득옹이 거의 매일 지나가는 회랑 중간쯤에 독거사동인 7사가 있는데, 이곳 독거 방에 명박산성 안에서 5년 내내 상득옹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두언 '거사'가 가부좌를 틀고 와신상담하고 있었습니다. 참, 두언 거사는 명박산성에서도 만사형통의 기세에 눌려 후미지고 외진 곳에서 토사구팽 당한 채 찌그러져 생활했었다고 스스로 주장했었던가요?
어쨌거나 명박산성 안에서 피 튀기는 기 싸움을 벌였던 두 '낙방거사'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법무부 국립호텔에 투숙 아닌 감금되어,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서 쓸개 없는 반달곰 신세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나그네는 무척 궁금합니다. 두 거사는 주거 제한된 국립호텔 내에서 오다가다 가끔은 서로 마주칠 일도 있겠지요.
나그네의 운동 친구 중에 '은 머시기'라는 조폭 보스가 있었습니다. 은은 상득옹의 짠한(?) 모습을 보면서 '늙고 병든 노인네를 여론몰이로 국립호텔에 감금시켰다'고 단순한 진단을 내리기도 하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은은 60대 초반의 또 다른 건달보스(?)를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광주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컨테이너 박스에 숨어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윤한봉 선생의 여동생이라나요? 은 머시기는 조폭보스 답지 않게 운동 시간에 운동은 뒷전이고 네잎클로버 찾기에 천착했습니다. 접견 때 '마누라에게 건네주면 무척 행복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분의 네잎클로버는 사동도우미 등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희대의 흉악범이라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강아무개씨는 나그네를 처음 대면했을 때 한동안은 나그네를 '어르신'이라 불렀습니다. 으잉! 웬 어르신? 아마도 희끗희끗한 구렛나루 수염 때문이었겠지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서로간의 행동거지나 말 섞임의 횟수가 늘어나자 이번엔 나그네를 '선생님'이라 부르더군요. 흐흐흐.
반세기만에 가장 추웠다는 혹한의 겨울도 지나고 담장 안 길양이들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흥에 겨워 나른한 오수를 즐기던 어느 날, 슬그머니 호칭이 '형님'으로 바뀌더군요. 강씨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씨는 독거운동장 한켠에 해마다 봄이면 푸성귀나 꽃들을 키워오고 있었습니다. 텃밭 가꾸는 일에 조금 내공이 있는 듯 해 보였습니다. 나그네가 그의 텃밭 가꾸기에 관심을 보이자 대뜸 돌아오는 강씨의 말풍선은 이랬습니다.
"형님! 텃밭 가꾸기에 흥미가 있으시면 내년 봄에는 지가 앞장서서 도와 드리지유. 염려 붙들어 매랑게유."나그네는 살점 두둑한 강씨의 어깨살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힘껏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해. 이 친구야. 그래, 올 겨울을 또 이곳 국립호텔 독거방에서 보내라구? 에라이, 천하에... 하하하하하""말이 그렇게 흘러 갔남유? 헤헤헤헤헤. 그럼 편히 쉬시유. 내일 뵈유. 형님."1심 최종 판결을 하루 앞둔 날, 운동 마치고 긴 회랑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두 사람의 말풍선이었습니다. 강씨는 옥방 안 건달들도 '깨갱'하는 천하에 둘도 없는 흉악범이기도 했지만 '강호동' 찜 쪄 먹는 넉살 좋은 두 얼굴의 중년 사내였습니다.
나그네, 드디어 내 땅의 강변가에 새 둥지를 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