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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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심장을 파고 든 하나의 단어는 바로 '엔진'이었다. 앞칸의 지배자들은 엔진이 멈춘다면 모두들 얼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는 곧 멈추지 않는 엔진과 기차를 만들고 그것을 계속 돌아가게 하고 있는 윌포드에 대한 경의와 우상화로 이어진다. 지금의 지배체제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7명은 열차를 탈출했다가 얼마 못 가서 곧바로 얼어 죽었다. 그 현장은 기차 속 학생들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고 있었다.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한국 사람들이라면 영화에서 들려오는 이 외침마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익숙한 구호 하나가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성장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먹고 살 것이 없는 우리나라는 수출을 통해 성장을 해야 하고, 일단 그렇게 파이를 키워야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성장우선론은 박정희 시대 이후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설국열차 안에서는 멈추지 않는 엔진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다 얼어서 죽느니 차라리 이런 불공평하고 부당한 체제라도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느냐, 지금의 질서가 무너지면 기차는 멈추고 모두 죽는다는 논리는 지금 한국사회의 지배논리와 너무나 닮았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쿠데타도 할 수 없고 긴급조치도 웬만큼은 참을 수 있는 것 아니냐, 민주주의라는 거 잠깐 좀 유보한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지 않느냐, 체제가 불안정해지면 북한이 언제 우리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상황 논리는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연이은 삼선개헌 및 유신개헌을 뒷받침해왔고 마침내 그의 딸까지 대통령의 권좌에 올려놓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성장 엔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대기업이 잘 돼야 국민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그 덕에 대기업은 블랙아웃이 걱정되는 이 폭염 속에서도 여전히 헐값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경제가 어렵다고, 경제가 나아지면 지금일수록 경쟁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며 언제나 '성장 엔진'은 신성불가침의 보호를 받아왔다. 호경기든 불경기든 일반 국민들의 경제상황이 정책의 우선순위에 오른 적인 한 번도 없었다.
이 모든 논의의 결론은 <설국열차>의 메이슨 총리가 내뱉는 하나의 구호로 모아진다.
"자기 자리를 지켜라."언뜻 보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외침은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려 했고 종국에는 죽음에까지 내몰았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애초에 노무현과 권양숙을 대통령과 영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대통령과 영부인이라는 자리가 감히 상고 출신에게 허용되는 게 아니었다. 선거 관련 발언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건수로 노무현을 탄핵하려 했을 것이다.
모두가 출신에 따른 자기 자리만 지키는 사회는 마치 혈액이 멈춘 몸과도 같아서 오래지 않아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도 제국 내 계층 간의 이동이 꽉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IMF 이후 한국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가 돼 버렸다. 2013년의 현실도 여기서 크게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주장은 거짓이었다.
'거짓'은 영화 <설국열차>를 본 뒤 내 가슴에 남은 유일한 단어였다.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송강호)는 열차 바깥의 설국세상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의 딸 요나(고아성)는 열차 밖에서 북극곰을 목격하게 된다. 북극곰이 살 수 있다면, 그 옛날 7인의 반란을 이끌었던 이누이트도 이제는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북극곰의 출현은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는 주장이 공갈 협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엔진이 멈춘다고, 열차 밖으로 나간다고 모두 죽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과연 어떨까? "성장 엔진이 멈추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것일까?
대기업이 잘 돼야 서민경제가 살아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론은 이미 현실에서 거짓임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 MB 정부의 고환율·감세 정책으로 큰 이득을 본 재벌들은 오히려 골목상권까지 잡아먹는 한편 자기들끼리의 일감 몰아주기로 막대한 부를 챙겼다. 국민들의 혈세로 위기를 넘긴 대기업이 바로 그 국민들의 뒤통수에 칼을 꽂은 격이다.
또한 기존의 성장 엔진인 값싼 노동력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싸구려 물건만 팔아서는 선진국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노동과 기술혁신의 정당한 대가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가격을 지불해야만 고부가가치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 고용과 기술혁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생존의 엔진으로 주목받아왔다.
우리가 올라탄 현실의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거짓말은 곳곳에 널려 있다. 원전을 더 짓지 않으면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지만, 무려 5기의 원전이 멈춘 지금 우리는 사상 최대의 폭염을 그럭저럭 힘들게나마 버티고 있다. MB의 대운하는 4대강 사업으로 둔갑해 추진해 왔음이 드러났다. 이제는 거짓말의 수준도 상당히 과감해져서, 정상회담 대화록을 제 입맛대로 왜곡해서는 멀쩡한 북방한계선도 우리 스스로가 내다버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