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식 전 대우조선해양 감사실장
구영식
법정에서든 찻집에서든 그를 만날 때마다 마주치는 '물건'이 하나 있다. 낡고 낡은 서류가방이다. 가죽의 결들은 다 일어났고, 어떤 부분은 검정색 가죽이 하얗게 변했을 정도로 닳고 닳은 가방이었다. 그 가방을 볼 때마다 기자는 '얼마나 오래된 가방일까?'라고 궁금해하곤 했다.
그 낡은 가방은 언제나 빵빵했다. 각종 소송자료들을 빼곡하게 넣고 다닌 탓이다. 그런데 지난 7월 26일 그 낡은 가방이 드디어 소송자료에서 해방됐다. 대우조선해양과 남상태 전 대표가 제기한 13억 원의 민사소송(손해배상)에서 원고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그의 승소가 최종 확정됐기 때문이다. 약 3년의 소송전 끝에 얻어낸 화룡점정이었다.
32년 은행원 생활 끝내고 대우조선해양 들어갔다가 '해고' 신대식 전 대우조선해양 감사실장. 경남 통영 출신인 그는 유신 체제였던 지난 1974년 부산대를 졸업하고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5·16 장학생'이었다. 반면 그의 동생 재식씨는 부산대 운동권으로 지난 79년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던 부마항쟁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신 전 실장은 도쿄지점장을 거쳐 임원급인 리스크관리본부장을 끝으로 지난 2006년 5월 한국산업은행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같은 달 대우조선해양의 감사실장에 발탁됐다. 대우조선해양은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이 대주주로 사실상 공기업인 회사였다. 32년의 긴 은행생활을 마치고 기업 내부감시자인 감사실장으로서 '인생 2막'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시기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건'이 터졌다. 대우조선해양은 감사업무 수행으로 취득한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고, 회사경영에 부정적 시각을 견지했으며, 근거없이 경영진을 비방했다는 등의 이유로 신 전 실장을 2008년 10월 징계해고했다.
하지만 신 전 실장은 "나를 무리하게 징계해고한 것은 여권 인사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의 L행정관이 민유성 한국산업은행총재와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3명을 보낼 테니 현재 근무중인 외부 영입인사 3명을 빠른 시일 안에 정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결국 청와대의 외압에 의해 자신이 징계해고됐다는 주장이다.
신 전 실장의 주장대로 지난 2008년 10월 1일 정하걸 재경포항향우회 사무총장, 오동섭 전 이재오 특임장관 특보, 함영태 전 한나라당 부대변인 등 여권 인사 3명이 대우조선해양의 상근고문으로 들어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기업 등에서 보은인사를 벌여온 관행이 되풀이된 것이다. 이들의 연봉은 1인당 1억8000만 원에 이르렀다.
청와대 외압 의혹 제기하자 13억 손해배상 등 '소송폭탄'
신 전 실장은 지난 2010년 7월 <프레시안>과 <민중의 소리>, <내일신문> 등과 한 인터뷰에서 '청와대 외압에 의한 징계해고'를 거듭 주장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23일 열린 이재오 특임장관 인사청문회에도 증인으로 나와서 같은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때부터 대우조선해양 및 남상태(현 상임고문) 전 대표의 소송전이 시작됐다. 먼저 신 전 실장이 언론들과 한 인터뷰 내용을 문제삼아 지난 2010년 9월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등으로 형사고소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13억 원(대우조선해양 10억 원, 남상태 전 대표 3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냈다. 신 전 실장은 "언론 인터뷰에 이어 청문회에서까지 공개적으로 청와대 외압 의혹을 주장하니까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9월과 10월에 연달아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형사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는 약 7개월간 수사를 벌인 뒤 '청와대 외압 의혹'만 불구속기소했다. 공교롭게도 수사검사는 남상태 대표의 경동고 후배로 알려졌다. 다만 고소장에 포함된 ①임천공업, 건화기업과의 부당거래 의혹 ②남상태 대표의 비자금 조성과 연임 로비 의혹 ③부당징계해고 ④감사실 폐지와 관련한 허위사실 유포 등은 불기소했다.
하지만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과 항소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제9형사부)는 잇달아 신 전 실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12년 10월과 12월). 그리고 검사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해 결국 지난 1월 4일자로 무죄판결이 확정됐다.
그런데 대우조선해양과 남상태 대표는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서 불기소한 혐의들(앞서 열거한 ①-④)을 서울고검에 항고했다(2011년 6월). '항고'란 검찰이 내린 결정에 불복해 상급청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서울고검은 이들이 항고한 지 17개월 만에 항고를 기각했다(2012년 11월).
또한 대우조선해양과 남상태 대표는 13억 원 민사소송에서도 완패했다. 서울중앙지법 제25민사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2012년 11월),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제13민사부도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다(2013년 7월). 그리고 원고가 대법원의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지난 7월 26일 신 전 실장의 승소가 최종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