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란다 자카 입구네덜란드인들이 모여살던 집단 거주지인데, 소소한 서양건축물과 박석 깔린 길의 모습이 자못 이국적이다.
서부원
이렇듯 나가사키에는 '중국'도 있지만, 서양 여러 나라도 이웃처럼 만날 수 있다. 여느 지역에서처럼 박제화한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거나 목적에 맞게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 분주한 항구와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봉긋한 언덕 위에 자리한 '구라바' 정원과 그 아래 '오란다자카'는 나가사키의 또 다른 '외국'이다.
'구라바'는 글로버의 일본식 표기다. 토머스 글로버는 1859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나가사키에 들어와 차 무역과 조선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영국인이다. 구라바 정원은 그가 짓고 살던 저택과 정원을 관광지로 꾸며놓은 곳인데, 빼어난 전망과 역사적 의미로 인해 나가사키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사실 그는 우리와 '악연'이 있다. 당시 젊고 유능한 사무라이였던,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영국에 보내 서양 문물을 배울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일본을 침략해 통상 요구를 강제한 서구 열강의 일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토를 비롯한 일본 근대화의 영웅들을 길러낸 공을 인정받아 모든 일본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나가사키에 미쓰비시의 전신이 대형 조선소를 세웠고, 현재 일본 굴지의 브랜드인 기린 맥주를 창업한 이로도 유명하다. 말하자면, 상인으로서 사업 수완이었을지언정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끈 또 하나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복원된 그의 저택 안에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갖춰놓았으며, 글로버의 업적과 생애를 자세히 안내해주고 있다.
저택 곁에는 글로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마치 그의 부인인양 다정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이 많다. 아닌 게 아니라, 글로버는 이곳에서 일본인과 결혼했으며, 푸치니의 오페라 작품 <나비부인>도 그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세계적인 오페라의 무대가 구라바 정원, 곧 나가사키인 셈이다.
우리에게도 글로버와 같은 인물이 왜 없을까마는 이렇듯 외국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다. 예컨대, 조선 말 <대한매일신보>를 간행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영국의 언론인 베델도 있고,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한 헐버트 같은 인물도 우리에게 존경을 받을 만하지 않나.
그러나 그들은 그저 역사 교과서 끄트머리에 한두 줄 살짝 언급돼 있을 뿐이고, 찾는 발길이 뜸한 서울 한강변 양화진 야트막한 언덕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쓸쓸히 잠들어 있다.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 업적을 기리기는커녕, 근대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서양 제국주의자의 일원으로 오해되는 일도 더러 있을 정도다.
근대화의 성지처럼 꾸며진 구라바 정원에서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와 일본의 모습을 비교해보게 된다. 근대화를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과정쯤으로 이해하는 우리나라이고 보면, 두 나라의 근대화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가사키에서 글로버는 더 이상 영국인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 영웅 '구라바'일 뿐이다. 역사에서도 '이이토고토리'의 힘은 건재하다.
일본인 최초의 순교성지도 바로 '나가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