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문학사상사
영화배우 홍경인은 20대가 되기 전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 두 사람을 훌륭히 연기한 바 있다. 1992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전태일'이다. 앞의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고, 뒤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이 두 영화는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이 중 '엄석대'라는 인물은 작가 이문열이 만든 캐릭터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으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소설에는 엄석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다. 모두가 확실한 캐릭터로, 그들이 갖는 상징성은 확고하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 이문열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아니꼽고 하찮은 시골 학교의 '소왕국'소설은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시골 초등학교의 5학년 교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자인 '나'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며 내레이션 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새삼 '26년'이란 단어가 다가온다. 1987년에 출간된 소설의 화자 '나'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는 것과, 필자가 2013년에 26년 전인 1987년 출간된 소설을 리뷰하는 것.
한병태는 서울의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가 시골로 좌천되는 바람에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는 전학을 오자마자 시골 학교를 매도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를 내세우며, 엄석대 왕국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시골 학교의 '소왕국'이 아니꼽고 하찮게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형상화 작업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유와 폭력, 합리와 불합리의 대립. 현실정치를 우화적으로 비판·풍자하려는 움직임이다.
엄석대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2~3살이 많고, 키는 머리 하나만큼 더 크며, 축구를 잘 한다는 것. 그리고 전교 1등의 시험 성적. 이런 저런 이유와 그의 카리스마가 빚어낸 리더십은 확고부동한 엄석대 1인 독재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한병태는 외롭게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엄석대 왕국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학급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오는 선결적 조악함과 더불어, 엄석대의 능력에서 오는 조악함이다. 사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연유로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리시험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의 의도
이는 소설이 출간된 1987년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소설적 배경은 1960년대지만, 작가는 1987년을 말하고자 했다. 엄석대 왕국의 조악함은 그 첫 번째이다. 즉, 당시의 정치판이 초등학교 5학년 교실만큼 조악하다는 비판의 일갈이다. 여기에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조악함의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과, 그 자신 조악함의 상징과도 같다는 것이 읽힌다. 또한 한병태로 상징되는 변절자들의 이미지도 보인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 인물이 있다. 바로 엄석대 왕국 교실의 5학년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한병태가 엄석대의 비리와 횡포를 알아내 호소할 때, 방관자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순응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된 것일지라도,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만, 학급이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므로 그 속과는 상관없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작가 이문열은 이를 두고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0~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을 가리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