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행 군내버스를 타기 전구례구역에서 새벽 3시 5분에 내려 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2시간 노숙을 하고 화엄사행 첫 차를 탔다
김해규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인지 기차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몽롱한 눈으로 구례구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5분. 출구로 나가면서 택시기사에게 근처에 찜질방이 있는지 물었다. 얼마 전까지 운영했는데 근래 폐업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구례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택시를 탔다.
늦은 새벽 구례버스터미널은 지리산 등반객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대합실에 앉아 이틀 동안의 여행계획을 짰다. 아이들은 먼저 화엄사를 답사한 뒤 지리산 둘레길 18코스를 걷자는 제안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기야 뭘 알아야 이의를 제기하지.
북적대던 등산객들은 3시 50분 노고단행 버스를 타고 떠나고 우리는 화엄사행 첫차가 올 때까지 비박을 하기로 했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합실에 들어가서 긴 의자를 옮기고 나니 셋이 누울 수 있는 아늑한 잠자리가 확보되었다.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개인용 침낭을 덮어주며 2시간 동안 잠 좀 자두라고 당부했다. 눕자마자 골아떨어진 성이와는 달리 헌이는 파리가 날아다녀 잠을 잘 수 없다며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그게 파리 때문만이겠는가!
터미널 직원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것은 5시 30분.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정리한 뒤 화엄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6시를 조금 넘긴 화엄사 입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입장료를 받는 직원들도 출근하기 전이어서 우리는 무료 입장의 행운을 누렸다. 30대 시절 산을 좋아할 때는 무던히도 들락거렸던 화엄사는 거대사찰이면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가람배치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금강문 옆으로는 지리산의 경관을 가로 막는 거대한 건물이 완공단계에 있었고, 금강문,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도 비싼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현대 대형교회를 닮아가는 사찰, 사찰을 닮아가는 교회. 썩은 돈 냄새의 구린내 나는 향연.
아이들과 누정의 난간에 걸터앉아 화엄사 전각 너머로 부드럽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았다. 난간에서는 정면으로 대웅전, 좌측으로는 조선후기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각황전이 아름답게 조망되었다.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 각황전 앞의 석등과 사사자석등도 이곳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아침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발우를 손에 들고 서쪽 요사에서 쏟아져 나오고 나는 아이들에게 불교건축과 조각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으로 종교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인간의 탐욕이 종교를 얼마나 타락시키는가를 이야기했다고 해야 옳다.
4. 사람을 통하여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