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된 요한 하인리히 쉴바하가 그린 포로 로마노, 그림 속의 개선문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다. 자세히 보면 개선문의 절반 정도가 지표 아래에 있는데 흙을 파낸 다음 펜스로 두른 것을 볼 수 있다.
박찬운
얼마 전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그곳 미술관(함부르크 쿤스탈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이 세베루스 개선문과 관련된 아주 귀한 그림을 발견했다. 요한 하인리히 쉴바하(Johann Heinrich Schilbach)가 1827년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19세기 초 이 세베루스 개선문이 어느 정도 복원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선문의 거의 절반이 지표 아래에 있지만, 이즈음 주변 땅을 파낸 다음 거기에 시멘트 펜스를 두른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 수호자인가, 사악한 냉혈한인가... 로마 황제 중 황제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 그가 누군가. 그는 다른 황제와 달리 로마 황제 중 대제(the Great)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황제다. 이 황제 이전에 로마제국 역사에서 대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황제가 이 사람 말고 어디 또 있을까. 그만큼 이 사람은 로마사 아니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그의 개선문이 지금 로마에 있다. 바로 콜로세움 옆에 서 있는데 그 크기 또한 대제의 것답게 크다.
콘스탄티누스(272~337, 재위기간 306~337)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그의 인간성 자체를 생각하면 역사상 어떤 권력자도 사악함과 포악함에 있어 그를 능가하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처와 아들을 죽였다. 아들은 그의 후계자가 될 황태자였음에도, 처는 황제(막시미아누스)의 딸로 그가 권력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것이 이유다.
아들은 독살시키고, 처는 끓는 목욕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죽여 버렸다. 정말 끔찍한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다. 정적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했다. 그와 함께 공동황제였던 루키니우스(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의 남편)도 끝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정계를 은퇴했지만, 모반했다는 이름으로 그 아들(콘스탄티누스의 조카)과 함께 살해하고 말았다.
이런 황제임에도 역사는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의 수호자로 기록한다. 권력과 종교가 어떤 관계를 맺어 공생했는지를 우리는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종교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함부로 비판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가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이것은 세계적 종교가 된 그 어떤 종교에서도 예외가 없다. 속세의 권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 종교라 불리는 것들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소위 보편 종교로서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절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던 그의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 헬레나를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자신을 수호하고 황제의 권력을 도와줄 것이라 믿게 된 것은 그의 숙적인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밀비아 다리 전투였다.
당시 로마제국은 몇 명의 공동황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로부터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로마에 있는 막센티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꺾지 않고서는 안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회심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진격한다. 312년 어느 날 드디어 이 둘은 로마 외곽에서 맞붙게 되는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에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계시에 따라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부하 장병의 모든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하고 전투에 임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로마 한가운데를 흐르는 티베르 강에 도륙해 던져 버린 것이다. 이날 이후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가 자신을 수호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믿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 정도다. 기독교 입장에서도 그 오랜 세월 박해에서 벗어나 공인 종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만난 것이다. 권력과 종교가 만나 상호 권력을 향유하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이 밀비아 다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중요한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드디어 기독교를 공인한다. 역사는 이를 밀라노 칙령이라 부른다. 이제 기독교는 지하에서 활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기독교도는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포교할 수 있고 그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보장했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과거 황제(특히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몰수되었던 재산까지 돌려줌으로써 기독교에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는 공인에서 끝나지 않고 사실상 국교화 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두 번째는 325년의 니케아종교회의이다. 이 당시 기독교는 중세나 그 이후처럼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많은 분파의 기독교가 생겼는데 크게 두 파가 대립한다. 3위 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와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다.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강력한 종교로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교회의 안녕을 빈다는 차원에서 이 둘 중에서 하나의 손을 들어 준다. 이로써 기독교 역사에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지목되었고 박해를 받게 된다.
세 번째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이탈리아 반도와 서유럽 전체를 기부했다는 이야기다. 이게 소위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관한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기진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함으로써 속세의 왕은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중세 시절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만든 거짓말이었다. 기진장 원본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가짜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결코 그런 문서를 만든 적이 없었다. 이것을 최종적으로 밝힌 이가 15세기의 로렌초 발라이다. 그는 이 기진장에 들어 있는 단어가 콘스탄티누스가 살아 있을 때인 4세기의 언어가 아니라 그보다 4백 년이나 뒤인 8세기의 언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교회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한 가지 더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 말해 둘 것은 그로 말미암아 비잔틴 제국, 곧 동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공동 황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단독 황제가 되지만 더 이상 수도를 로마로 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새로운 수도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비잔티움, 후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이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나뉘고 5세기 말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동로마가 로마제국을 이어받아 다시 1천 년의 역사를 쓰게 된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는 바로 유럽의 역사를 다시 쓴 장본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수호자의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