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에는 김규진이 쓴 '미륵불' 세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사진의 하얀 동그라미 부분.
정만진
김규진의 글씨 중에서, 전문가들의 안목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작품은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 바위에 새겨진 '彌勒佛' 세 글자였다. 56억7000만 년 뒤에 나타나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원해준다는 미륵불을 대중은 왜 기다릴까. 현실 세계의 조악한 정치 때문이 아닐까. 장소가 금강산이라는 점에 힘입은 바도 컸겠지만, 나는 구룡폭포 앞에서 미륵불 세 글자를 보며 감동에 젖었던 추억을 이곳 사자루에서 다시 한번 맛본다.
사비정에서 왼쪽으로 돌아내려가면 낙화암이 나온다. 낙화암은 660년 의자왕의 3000궁녀가 망국의 한을 안고 뛰어내렸다는 전설의 바위이다. 꽃이 떨어진 바위!
낙화암의 본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었다고 전한다. 사람이 떨어져(墮) 죽은(死) 바위(巖)라는 뜻이다. 그렇다. <낙화삼천>에도 <꿈꾸는 백마강>에도 낙화암으로 나오고, 모든 국민들도 다 그렇게 부르지만, 낙화암은 타사암일 뿐이다.
60m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백제의 여인들은 '꽃'이 아니다. 낙화암은, 좋게 말하면 후세인들이 그녀들을 미화한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충성 이데올로기와 성차별의 완고함이 묻어 있는 어휘이다. 아마도 그녀들이 안다면 이렇게 항변하리라. 우리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다!
'삼천 궁녀' 운운도 고쳐야 옳다. 당시 백제는 전체 인구가 200만 정도였다. 그렇다면 3000명은 여성 100만, 그 중에서도 아이와 나이 든 이들을 제외한 젊은 여성 20만 중 1/66에 해당된다. 21세기 현재로 치면 7∼8만에 이르는 인원이다. 아무리 의자왕이 미워도 '3000궁녀'를 들먹이며 비난해서야 타당하지 못하다. 절벽 아래에 남아 있는 '落花巖' 세 글자는 송시열이 썼다고 하는데, 누가 지금 그곳에 올라 '타사암'이라 새긴다면 그는 물론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잡혀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