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선 늘씬한 모델이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이 정도는 돼야지'라고 으스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속으로 혜수 언니의 말을 그림 속 그녀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너, 그대로 일하면 죽을 맛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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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스트레칭법도 좋지만 손님이 없을 때는 의자에 앉아도 된다고 하면 안 되나? 대기할 때조차 등을 벽에 기대거나 짝다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무리 봐도 가혹한 처사다.
백화점 사장 및 간부들에게 1주일만 10시간씩 서서 일해보라고 하면 그런 지침은 사라질 것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서서 일하는 서비스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덕에 마트와 백화점 포스에 의자가 생겼지만 여전히 서비스노동자들에겐 눈앞의 의자가 그림의 떡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편해야 서비스도 좋아지고 매출도 오른다는 두 수 앞을 경영진은 읽지 못한다.
어느 날 본사에서 유니폼 가이드라인을 알리는 메일이 왔다. 셔츠는 윗단추 두 개를 풀고 재킷이나 카디건 밑으로 소매가 약간 보이도록 입으라는 등 유니폼 지침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머리는 백화점 교육 때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넘으면 하나로 묶든가 꽁지머리를 하란다. 자연스런 화장법도 친절하게 설명해 놨다.
혜수 언니가 동복으로 입을 카디건을 드라이해놨으니 그걸 입으면 된다고 얘기하면서 가이드라인 속 그림을 보더니 "저렇게 신으면 죽지"라고 한 마디 한다. 그림 속에선 늘씬한 모델이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이 정도는 돼야지'라고 으스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속으로 혜수 언니의 말을 그림 속 그녀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너, 그대로 일하면 죽을 맛일 걸.' 그리고선 내 발을 감싼 검정 신발을 쳐다봤다. 휴무날 사려다가 도저히 못 참고 취직 6일 만에 쉬는 시간을 반납하고 스포츠매장에 가서 산 스니커즈다. 내 사전에 세일기간도 아닌데 백화점에서 신발을 사는 일은 등록된 적이 없지만 사람이 궁하면 안 하던 짓도 하는 법. 그만큼 내겐 편한 신발이 간절했다. 백화점 교육 때 신발은 검정색 구두와 스니커즈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발 매장엔 쿠션이 좋은 운동화가 많았지만 검정색이 아니어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여러 매장을 돌다 거의 유일하게 검정색이던 스니커즈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스니커즈가 단화보다는 편했다. 그렇다고 스니커즈가 내 다리건강을 책임질 거라고 마음 놓을 수도 없었다. 나처럼 스니커즈를 신고 일하는 혜수 언니가 갑자기 아침에 출근을 못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무척 괴로운 목소리로 언니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니는 병원에서 무릎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몇 달 동안 쉬는 날마다 정형외과에 가야했다. 백화점은 직원들의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었다.
비타민제도 먹었는데 장염은 왜?주위에서 계속 아픈 사람을 보니 나도 진경 언니처럼 내 건강은 내가 챙기자는 주의로 돌아섰다. 비타민제도 샀다.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다리 찜질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도 별로 소용은 없었다. 취직 1달여 만에 감기와 장염에 시달렸다. 내가 갑자기 기침이 심해지자 혜수 언니는 올 게 왔다는 듯 의무실에 가서 물약을 타오라고 말했다. 기침감기엔 그 약이 최고라면서 언니는 내 등을 떠밀었다.
지하식당 옆 작은 의무실엔 간이침대와 책상, 의자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 두 개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간호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맞는다. 의자에 앉을 필요도 없이 증상을 말하니 익숙한 듯 혜수 언니가 말한대로 물약을 지어준다. 간호사는 무심히 약을 건넸지만 효과는 혜수 언니의 말 그대로였다. 약국에서 산 감기약으로는 멈추지 않던 기침이 그 약을 먹고 나서는 잦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걸린 장염은 감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집에서부터 속이 아팠지만 꾹 참고 출근을 했다. 매장에 나가서는 10분이 멀다하고 화장실을 찾았다. 고객에게 상품 설명을 하다가 화장실로 뛰어가기도 했다. 나중엔 서 있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얼굴이 노래진 날 보고서 혜수 언니는 빨리 점심을 먹고 와서는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고맙다는 얘기도 제대로 못하고 바로 가방을 챙겨들고서 병원에 갔더랬다.
혜수 언니도 몇 달 전에 장염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내가 고생한 얼마 후엔 매장 점장도 장염에 걸렸다. 반년 안에 한 공간에서 일하는 세 사람이 모두 장염에 걸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세 사람의 식습관이나 소화기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만큼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진단에 손을 들련다.
백화점에서 영혼이 상처입다